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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실록한의학]〈48〉세종, 머리풀고 발벗고 울부짖다

입력 | 2018-03-26 03:00:00


동아일보DB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태종 이방원은 요즘 말로 ‘나쁜 남자’다. 그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남편인 이방원이 왕좌에 오르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건 잘 알려진 사실. 1차 왕자의 난 때는 친정 민씨 형제들이 몰래 숨겨놓은 무기로 거병을 지원했으며, 2차 왕자의 난 때는 동복 친형인 이방간의 도전에 고민하던 이방원의 등을 떠밀어 제압하게 했다. 태종도 원경왕후의 공이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 유씨보다 크다고 인정했다.

이 부부는 원경왕후의 시녀인 김씨가 이방원의 아이를 몰래 임신하면서부터 원수 사이가 됐다. 시녀의 임신에 분노한 원경왕후는 김씨와 아이를 엄동설한에 집 앞 다듬이 돌 옆에 버리게 했다가 태종의 엄청난 노여움을 사게 된다. 태종 15년 12월 15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원경왕후는 자신의 노비로 궁에 들어온 자가 (태종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죽이려 마음먹었다. (중략) 민씨 일가가 음참하고 교활해 여러 방법으로 (아이를 죽일) 꾀를 내었는데,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그 핏덩어리에게 하는 짓이 극악하였다.”

이후 외척인 민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민무구 등 세종의 외삼촌 4형제가 차례로 태종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세종 2년, 태종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에 시달리던 원경왕후는 학질(학疾)을 앓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종의 극진한 간호는 태종조차 감동시켰다.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는데, 오늘에야 알고 보니 대비의 학질을 근심한 주상이 마치 필부(匹夫)처럼 대비를 모시고 혼자 말을 타고 나가 병이 낫기를 도모한 것이었다. 심히 그 효성이 아름답다.”

세종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궁궐을 비우고 국정을 내팽겨 둔 채 간호에만 집중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실록은 세종이 원경왕후의 학질을 떼기 위해 머문 곳을 언급했는데, 개경사라는 절, 오부·최전의 집, 이궁(離宮) 남쪽 교외의 풀밭, 갈마골 박고의 집, 송계원 냇가, 선암 동소문, 곽승우, 이맹유의 집 등 어지러울 정도로 많았다. 이는 학질을 고치기 위해선 한 곳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무속신앙에서 비롯된 치유 행위로, ‘학(학)을 뗀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외에도 어머니의 학질 치료를 위한 세종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된다. 유학의 나라 조선의 왕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에서 피병할 때 술사둔갑법(術士遁甲法)을 쓰다.” “도류승(道流僧) 14인을 모아 도지정근(桃枝精勤·복숭아 가지를 잡고 기도하는 도교의식) 의식을 베풀었다.” “무당을 시켜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학질이 낫기를 기원했다.”

조선의 의료체계는 유학을 근본정신으로 삼고, 의약(醫藥)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병은 인간의 기질과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수양하는 양심(養心)이 치료의 시작이 됐다. 하지만 무속은 질병을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고 마음을 달래는 안심(安心) 행위로 치유를 시도했다.

원경왕후는 결국 학질로 인한 호전과 악화를 세 번이나 반복한 끝에 세상을 떠난다. 실록은 세종의 애통함을 이렇게 기록했다. “음식을 먹지 않은지 수일이었으며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하였다.” 조선의 그 어느 왕보다 유학과 과학에 심취했던 세종도 어머니의 불치병과 죽음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선 이성보다는 무속으로 안심을 택한 보통의 사람이었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