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표 상권에 무슨 일이…
여기도 저기도 “임차인 찾습니다” 애플이 시세의 2배가 넘는 상가 임대료 20년 치를 선납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가로수길 상가 임대료는 올해 들어 10% 넘게 뛰었다.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세입자들이 점포를 비우면서 가로수길 공실은 최근 10년 새 최대 수준으로 늘었다. 26일 가로수길 상가 곳곳에 임대 문의 안내문이 걸려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최근 애플스토어 같은 ‘랜드마크(지역을 대표하는 표지) 임차인’이 들어온 뒤 상권이 오히려 망가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개업자와 부동산 컨설팅사들의 농간이 개입됐다는 지적이 많다.
가로수길 상권이 쇠락하기 시작한 건 “애플이 시세의 2배에 달하는 임대료 20년 치를 한 번에 선납했다”는 뜬소문이 돌면서다. 이 때문에 이 일대 임대료가 빠르게 오르면서 ‘젠트리피케이션’(높은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기존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가로수길에서 만난 애플스토어 토지 주인 이모 씨는 “20년 치 임대료 선납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했다. 이 씨는 “근저당권은 장기 계약에 따라 애플 측에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장치일 뿐 임대료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했다. 이어 “매달 임대료를 따로 받고 있으며 계약상 비밀유지 의무 때문에 정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시세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 번 퍼진 소문에 임대료는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인근 M중개업소 관계자는 “건물주들이 애플스토어가 냈다는 임대료를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 맞춰서 월세를 받으려고 한다”며 “3.3m²당 월세가 최근 150만 원 선으로 올해 들어서만 10% 정도 올랐다”고 했다. 또 다른 중개업소 관계자는 “매출은 제자리걸음을 하는데 임대료가 오르면서 빠져나가는 사람만 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한때 상가마다 최대 3억∼4억 원에 달했던 권리금도 최근에는 3000만∼4000만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업계에서는 건물값과 임대료를 끌어올려 단기간 수익을 낸 뒤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일부 외국계 사모펀드와 부동산 중개업자 등의 ‘치고 빠지기’ 전술이 서울 곳곳의 상권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중개법인 관계자는 “외국계 사모펀드의 경우 국내 시장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중개법인 입장에서는 건물 가격을 다소 부풀려 팔게 되고, 건물주들은 오른 건물값을 보전하기 위해 임대료를 높여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상혁 상가정보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외국계 부동산 컨설팅사 입장에서는 상권이 꺾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매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때를 투자 적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같은 패턴이 서울 내 다른 상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압구정동 K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 역시 상권이 꺾이기 시작한 시점에 돈 냄새를 맡은 중개업자들과 외국계 자본들이 시세만 올려놓고 빠져나가면서 더 빨리 망가졌다”고 했다. 최성호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은 “건물 임대차 계약의 경우 중개업자와 계약 당사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구체적인 임대료 수준이나 조건 등을 알 수 없는 ‘깜깜이 거래’나 다름없어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