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산책’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다. 무용한 산책의 유용함, 쓸모없는 일의 쓸모 있음을 강변하고 있어 흥미롭다. 더구나 이 말이 당신은 매일 산책이나 다니지 않느냐는 세무 공무원의 조소 섞인 질문에 대해 주인공 ‘나’가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어서 더 그렇다. 가난한 작가인 나는 세무서를 찾아가 세율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는데, 세무 공무원으로부터 당신은 매일 산책이나 다니지 않느냐는 힐난을 받는다. 주인공은 아주 장황하게 자기가 산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산책의 효과를 열거한다. 산책의 조건과 규칙도 제시한다. 대상에 몰입하고, 사물을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어야 하고, 동정과 공감과 감동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나름의 산책론이 펼쳐지고 있는 대목이다.
발을 움직이고 있을 때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보기 드문, 특별한 수준의 기나긴 산책자’라고 이 책을 번역한 배수아가 소개한 발저만은 아닐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나 니체나 칸트는 산책가로 워낙 유명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가가 산책을 통해 창작 모티프를 얻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보고,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맞아들인다. 산책은 초청의 방식이고, 맞이하는 기술이다. 훈련보다 자유가 예술가에게 더 필요한 이유이고, 간혹 성실한 노력파가 자유분방한 몽상가에게 좌절하는 일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실한 사람은 노력하고 애쓸 줄만 알고, 초청하거나 맞이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산책’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목적지는 없을지 몰라도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 정해진 길이 없다면 내부에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부의 길을 찾기 위해 외부의 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걷기가 순례가 되고 수행의 한 과정이 되는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역시 초청과 맞이하기에서 그 비밀을 찾을 수 있다. 걷기가 자기 힘으로 억지로 잡아당겨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의 지배를 받을 때 그 걷는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맞이하는 기쁨이 없다면, 그 순례자는 다만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고, 그 수행자는 그저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고행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길에 대한 경계가 없을 수 없다. 유용의 무용함, 목적 있는 일의 무목적성에 대한 경고문 같은 것을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에서 읽는다. 그는 프로방스를 세 번 여행했는데, 아비뇽을 비롯한 프로방스의 몇 도시에 대한 인상을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어 보냈다. 그 가운데 바람이 많은 산이라는 뜻의 방투산 정상에 오른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를 부러워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 그는 방투산에 오르지는 않았거나 못했던 것 같다. 페트라르카는 방투산에 올라 눈앞의 광경에 감탄하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찾아 읽고 받은 깨달음을 고백한 바 있는데, 릴케는 바로 그 부분을 인용한다. 릴케가 인용한 페트라르카의 편지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0장에 나오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산봉우리, 바다의 무시무시한 파도,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 대양의 물거품, 그리고 천체의 궤도 등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