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그가 병들어 장차 죽게 되자 아들을 불러 은밀히 말하였다. “태창 몇 번째 기둥에 구멍이 있는데, 크기가 손가락만 하다. 그 안에는 쌀이 잔뜩 쌓여 있는데 막혀서 흘러나오지 못한다. 너는 손가락 굵기만 한 나무 막대를 가지고 가서 구멍을 후벼 쌀이 흘러나오게 하되, 하루에 다섯 되가 되거든 중지하고 욕심껏 취하지 말아라.”
권필(權韠·1569∼1612) 선생의 ‘석주집(石洲集)’ 외집 제1권에 실린 ‘어떤 백성 이야기(倉氓說)’입니다. 태창(太倉)은 조선시대에 관원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창고인 광흥창(廣興倉)의 별칭입니다. 창고 기둥에 구멍이 뚫린 것을 혼자만 알고 있던 아버지가 하루 다섯 되씩 쌀을 훔쳐 내서 그걸로 평생을 잘 살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 아들에게만 남몰래 영업 비밀을 알려줍니다. 욕심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백성이 죽은 뒤 아들이 이어받아 그 일을 하니, 옷이며 음식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구멍이 작아서 쌀을 많이 꺼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끌로 파서 구멍을 크게 만들더니 하루에 몇 말씩 쌀을 취하였다. 얼마 후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또 끌로 파서 구멍을 더 크게 만들었다. 마침내 창고를 지키던 관리가 쌀을 도둑맞은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아들을 잡아서 죽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