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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한반도] 김정은의 첫 방중…18년 전 김정일 때와 닮은 꼴

입력 | 2018-03-27 19:00:00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방중은 꼭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당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2인자 시절인 1983년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고 1997년 노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가 된 뒤인 2000년 5월 29일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일 방중의 전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정일이 전용열차인 ‘1호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와 다음 날인 5월 3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귀국길이 시작된 31일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들을 통해서였다.

김정은이 다음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있는 것처럼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4월 1일자)는 김정일의 깜짝 방중 목적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 향후 국제관계 변화와 중국의 지속적인 지원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양국의 전략적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년 전 김정일은 베이징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고 롄샹(聯想) 그룹 컴퓨터 생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5일 평양을 출발해 중국 단둥(丹東)시를 넘어 26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정은 일행이 27일 바로 귀국할 경우 18년 전 김정일과 비슷한 2박 3일 중국에 체류하는 같은 일정이 된다.

김정일의 2~7차 방북 사례에 따르면 일정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까지 여섯 차례 더 방중하는 동안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 앞뒤로 중국 지역을 여행해 최장 8박 9일(2006년 1월 10~18일)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회담 준비에 바쁠 김정은은 짧은 실무 방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18년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북한은 핵 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눈앞에 둔 상태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냐 미국의 군사공격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교차로에 서 있다.

생전 김정일을 베이징에 불러들여 ‘중국식 개혁개방’을 다정스럽게 촉구했던 중국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거듭된 김정은의 만행에 후원국으로서의 외교적 지원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아버지 김정일의 집권 초기 방중을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향한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시큰둥한 상황이다.

실제로 집권 초기 김정일에게 중국 방문은 김씨 일가 세습 독재라는 낡은 정치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조금씩 이식하는 ‘북한 식 개혁개방’의 현장 학습이었다. 김정일은 첫 방중 뒤 1년이 채 안 된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며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추동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듬해인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허용 등의 조치로 구체화했다.

스텔스 기능 등 최첨단 보안 장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04년 4월 3차 방중에서 김정일은 새로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톈진(天津) 등의 경제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귀국 하루 뒤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고받았다. 2010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주민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고가 “김정일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식 보도했다.

2005년 가을을 고비로 이전의 경제 개혁·개방을 뒷걸음질시키는 가운데 이뤄진 이후 네 차례의 방중은 늙고 쇠한 정치인 김정일의 내리막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국제사회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 2006년 1월 네 번째 방중에 나섰던 그는 10월 9일 돌연 1차 핵실험을 하며 돌아올 수 없는 ‘핵보유국 놀음’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 일어난 뒤 세 번의 방중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 정치인의 바깥나들에 다름 아니었다. 사망 직전인 2011년 5월 마지막 중국 여행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용열차 안에서 보냈다.

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