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부탁을 거절 못하는 아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피치 못하게 해야 하는 부탁도 하지 못하고, 들어줄 수 없는 사정인데도 친구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왜 그러는 걸까?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좋은 사람이고 싶은 갈망이 크다. 그래서 ‘부탁을 거절하면 친구가 싫어할까 봐’, ‘친구에게 부탁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등을 미리 걱정한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은 친구의 부탁은 무리해서라도 들어주는 반면,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못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의식이 점점 커져간다.
사례의 은지처럼 친구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해서 기분이 나빴던 경험이 있다면 더욱더 거절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게 된다. 거절하면 그 친구도 자신과 똑같이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단정 짓기 때문이다. 부탁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매우 크다. 혼자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최악의 결과가 나올까 봐 항상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입이 안 떨어진다. 이런 아이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 주는 일이 급선무이다. 매우 여린 성격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감정적으로 먼저 느낀다.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정서와 인지 능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 때문에도 갑자기 상대가 싫어지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괴로워할 이유가 아니다. 이 때문에 부탁을 잘 들어주고 노력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준다.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므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일러둔다. 엄마가 항상 좋아도 숙제를 하라고 잔소리를 하면 순간적으로 미워지듯이 말이다.
어렵게 들어주는 부탁일 때는 때로는 생색을 내도 괜찮다고도 말해준다. 내 수고를 상대에게 과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무언의 표현을 하라는 뜻이다. “내가 너를 위해 엄마께 특별히 부탁했잖아”라는 말은 약간 생색내기이지만, 돈독한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자 비법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감정보다는 인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인 수준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벼운 부탁은 서로 쉽게 들어준다. 하지만 쉽게 들어주지 못하는 힘든 부탁은 누구든 거절할 수 있다. 그것은 ‘너’이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미리 포기할 필요도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뜻밖에 친구가 부탁을 들어주면 고마운 일이고, 거절을 하더라도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었다는 점을 아이가 수긍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어떻게 대처를 할지를 여러 번 연습하다 보면 감정이 앞서 상처를 받는 일을 차차 줄여갈 수 있을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