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시진핑 회담
숙소 찾아온 시진핑, 반기는 김정은 27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양위안자이에서 열린 오찬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에서 두 번째)이 환히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있다. 오찬에는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왼쪽)와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도 참석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이승헌 정치부장
김정은은 대북특사단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에선 비핵화 논의를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다. 특사단을 평양으로 불러서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만 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트럼프에게 전한 메시지에는 아예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 때문에 9일 트럼프가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한 뒤 한미를 중심으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원샷 타결’, 정상 간 합의에 따른 ‘톱 다운식’ 비핵화 가능성이 회자됐다. 청와대는 최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 버리는 방식처럼 북핵 이슈를 한 번에 풀어보겠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일사천리로 북-미 간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비핵화 이슈에 대한 생각을 왜 지금 밝혔을까. 많은 한반도 전문가는 시점을 고민하던 김정은이 그리도 바랐던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를 통해 그 폭발력을 극대화하려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 집권 후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내부 체제를 결속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방중을 추진했으나 시 주석은 허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할 정도로 아버지 김정일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데다 지속적인 핵·미사일 도발로 중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5, 6차 핵실험에 이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을 거의 완성 단계까지 끌어올리면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기조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따’가 됐고 적지 않은 외교적 압박까지 받았다. 그러다 보니 북-중 관계는 최근까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 김정은이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기조를 주도하고 남북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밀어붙이자 시 주석의 계산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 주석은 정의용 실장이 베이징을 방문해 김정은 면담 결과를 설명하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양회’(兩會·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구축하는 내치에 집중해 온 시 주석은 이 작업이 완료되자마자 김정은에게 “베이징으로 오라”고 요청했고 김정은은 아버지가 타던 1호 열차를 타고 달려가 집권 7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혈맹 관계를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중국이 걱정할 정도로 급격한 비핵화 프로세스를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한미의 단계적, 동시적 조치’라는 조건을 통해 분명히 했다. 시 주석은 이를 듣고 고위급 인적 교류 확대 등 북-중 관계 개선을 위한 4대 조치를 언급했다.
중국은 겉으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불러올 급속한 비핵화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북-중 관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 표현은 중국에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인지 보여준다. 북-미 정상회담이 잘될 경우 동북아에서의 미국 영향력이 확대될 수밖에 없고 중국은 북한이라는 국제정치적 완충망의 효용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시 주석 앞에서 한미가 상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비핵화가 어렵다고 밝히면서 한반도 비핵화 게임에 중국이라는 선수가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실마리를 찾으려던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해법도 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김정은이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데다 상황에 따라서는 북-중이 ‘2인 3각’ 대형으로 협상에 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도 전열을 재정비해 비핵화 게임에 끼어들 수 있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북-미, 남북미 간에 논의될 듯하던 비핵화 논의가 6자회담 틀로 복원하는 듯한 구도”라고 분석했다. 조건 없는 비핵화를 강조해온 미국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는 김정은의 방중 직후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김정은과의 위험한 북-미 정상회담을 몇 개월이라도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대화 훈풍으로 인해 넘실댔던 ‘원샷 타결’ 등의 비핵화 액션 플랜은 김정은-시진핑의 회담 결과로 재확인된 ‘단계적 비핵화’ 구상을 계기로 오히려 차분히 들여다보고 미세 조정할 계기를 갖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북한에는 미국보다 대외 교역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한반도에 너무 빨리, 짙게 피었던 ‘장밋빛 안개’가 걷히고 비핵화 봄을 위한 진짜 게임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