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완의 기운에 흠뻑 취했다. 경기여고 동창회인 경운회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서울 삼성로)에서 고려와 조선의 다완 29점을 감상했다. 다실에 어울리는 전통 서화작품들과 함께 배치된 다완들은 우리 선조들이 즐긴 다실 문화를 실감나게 재현한 듯했다.
전시회 이름은 ‘다선일미(茶禪一味).’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년)가 차 반사발로 번민과 근심을 씻었고, 차 한사발로 참선을 시작했다는 데서 따온 듯한 제목이었다. 거기에 더해 다완 자체에서 분출돼 나오는 품격 높은 기운은 ‘다실 풍수’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풍수학을 전공한 필자는 다완을 비롯한 도자기의 풍수적 활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감치 다완 등을 이용해 공간의 기운을 보충하는 ‘비보(裨補) 풍수’를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서화작품도 마찬가지다. 동양에서 탄생한 산수화(山水畵)는 원래 자연의 기운(氣運)을 화폭에 담아 실내에서도 같은 기운을 느껴보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철학자이자 화가인 종병(宗炳·375~443년)은 산수화를 도(道)를 드러내는 신물(神物)로 해석했다. 아름다운 산천을 눈으로 감상하고, 자연에 깃든 신령스러움까지 마음으로 깨달아 화가가 화폭에 담아내면, 그 아름다움과 신령스러움을 그림에서 똑같이 취할 수 있다는 게 종병의 화론(畵論)이다. 그리고 그런 그림은 감상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종병의 주장은 같은 기운은 서로 감응한다는 풍수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과도 맥이 통한다. 원나라 때 산수화가로 명성을 떨친 황공망(黃公望·1269~1354년)은 노골적으로 “그림 속에 풍수가 존재한다”고 했고,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1023~1085년)는 “산수화도 풍수처럼 발복(發福)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처럼 도자기나 산수화 등 예술품은 그에 상응한 기운이 배어 있다. 그래서 예술품을 가까이 두는 것은 자기 신분을 과시하는 치장품을 넘어선 풍수 인테리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도다완(井戶茶碗) 16세기에 제작된 조선의 이도다완은 굽 언저리에 몽글몽글한 형태의 ‘매화피’, 사발 안쪽 바닥의 포개 구운 흔적이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제작하기도 어렵거니와 위조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센 리큐는 1578년 10월 25일 야부노우치(藪內) 종화회(宗和會)에서 처음으로 이도다완을 보았다고 한다. 이도다완이란 명칭이 일본에서 정식으로 통용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이도다완을 천하제일이라고 했던 센 리큐의 제자 야마노우에 소지(1544~1590년)는 다완의 형태만 좋으면 좋은 도구라고 했다. 당시 이도다완의 형태가 우선시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전시기획을 맡은 예술품 감정전문가 이동천 전 명지대 교수는 “이도다완의 안쪽이 마치 우물처럼 깊은 느낌을 줬기에 ‘이도(井戶)’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전시회에는 이도다완 외에도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기운 좋은 다완들이 군데군데 배치돼 있었다. 다완들마다 기운이 조금씩 달랐다. 풍요의 기운이 넘쳐나는 다완이 있는가 하면, 권력과 명예의 기운을 주는 다완, 건강운을 챙겨주는 다완도 있었다. 기운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권해볼 만한 ‘기 체험’ 명소라고나 할까.
사실 도자기의 기운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깨지지 않고 변형된 채로 구워진 다완이 좋은 기운을 가졌다고 본다. 가마의 뜨거운 기운까지 버텨낸 다완은 그만큼 강력한 기운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도예가들이 일본인들의 수요에 맞춰 일부러 찌그러진 다완들을 많이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만들 때부터 찌그려서 구운 다완은 기운이 빠져 있기 십상이고 거기서 다완의 진정한 기운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상류사회의 일본인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독화로사도(獨畵鷺鷥圖)고려 시대 송과의 대외 연락 기점인 군산 선유도를 묘사한 ‘독화로사도(獨畵鷺鷥圖)’는 고려의 수묵화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