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50주기
시인 김수영
고미석 논설위원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반세기. 그럼에도 잊혀지기는커녕 갈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김소월 정지용 서정주로 이어진 근대시의 역사에서 독자적 행보로 ‘파괴적 혁신’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일상의 언어로 시를 썼다는 점. 아름답고 순수한 시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세속적 언어로 비루한 현실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이렇듯 그의 돌출적 상상력은 이전에 없던 세계를 보여주며 문단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창작과비평’ 주간과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이시영 단국대 초빙교수는 “그는 한국시의 낙후성에 반발하고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고루한 문법에 대해 저항했다”며 “지금 읽어도 젊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라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수영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유복했던 집안의 가세는 그가 태어나면서 기울었다. 평생 병치레도 잦았다. 최종 학력은 연희전문 영문과 중퇴. 연극에서 문학으로 항로를 바꾸고 1946년 ‘예술부락’을 통해 등단했다. 1950년 결혼 직후 전쟁이 터졌고 북에 의용군으로 징집됐다. 곧 탈출했으나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 이후 교사, 통역관 등 직업을 전전했고 4·19혁명 이후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등 혁명의 열기를 담아낸 시를 쏟아냈다. 동아일보 1960년 7월 7일자에 실린 ‘푸른 하늘을’도 그중 하나.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그렇다고 그를 참여시인으로 한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틀에 가두는 일. 실제로 참여시는 작품의 절반도 안 된다. 김수영 전집을 편집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김수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꿈꾼 자유는 압제로부터의 자유도 있지만 그만큼 혹은 더 중시한 것이 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김수영은 자신이 되고 싶은 가장 높은 비전에 근접하기 위한 자유를 소망했다.” 자신을 극한까지 끌고나가 자기갱생을 간절히 꿈꾼 김수영, 그의 작품을 이런 관점에서 되짚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자료: 동아일보DB, 민음사
‘항상 죽기를 각오하고 살자(常住死心·상주사심)’는 좌우명대로 시인은 매순간 치열하게 살았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은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칼끝을 권력뿐 아니라 스스로의 허위와 속물성에 가차 없이 들이댄 것이 증거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기검열을 몰랐듯이, 요즘 기준에서 ‘여혐’으로 여겨질 만큼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나 욕망을 드러내며 자기미화를 거부했다. 2011년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서효인 시인은 “무리하다 싶을 만큼 자신에게 진솔하고 솔직한 면모”, 즉 정직함을 김수영 문학의 특징으로 꼽았다.
억압적 시대에 대한 비판, 자연과 초월적 세계에 대한 사유, 감각의 쾌락, 생활인으로서 실존 등 모든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 김수영, 모순이 빚어내는 긴장감이 그의 시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급진적 주장을 하면서도 이념의 노예가 아닌 시인의 양심과 시민의 양식에 충실한 것도 그의 미덕. 4·19 직후 그는 세 번이나 신문사들로부터 시를 퇴짜 맞았다. 이유인즉. 한 편은 사이비 혁명 행정을 야유해서, 한 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해서. 나머지 한 편은 이승만이를 다시 잡아오라는 내용이 문제였단다. ‘예술이 가야 할 길은 정치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믿은 시인이 되살아난다면, 이념에 따라 내 편, 네 편 집단을 가르는 문단을 보고 깜짝 놀라지 싶다.
시인의 자유, 시민의 자유를 등가에 놓은 김수영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개벽을 경험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최고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전력투구한 인간, 기존 가치와 체계를 전복한 감수성으로 시의 새 영토를 만든 시인, 시대를 앞서간, 혹은 경계를 초월한 자유인. 그의 삶과 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