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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막는 정책에… “사람 뽑았다가 미래 리스크 될 우려”

입력 | 2018-04-02 03:00:00

[기업이 말하는 일자리 창출]대기업 22곳 인사-재무 책임자 설문조사




# 지난해 11월 현대차 울산1공장 생산라인이 멈춰 섰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 미국 수출이 늘어나자 ‘엑센트’를 생산하는 12라인에서 코나를 생산하려던 회사 계획에 노조가 긴급 파업을 벌이며 반기를 들었다. 급기야 쇠사슬로 생산라인을 묶어버리며 작업을 중단하자 회사는 수요에 맞춰 탄력적으로 생산라인을 운영하려던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최근 열린 주요 그룹 인사·노무 임원들의 모임은 “결국 답은 해외로 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으로 끝났다. 모임에 참석했던 A 씨는 “생산라인 변경 등을 위한 노사협의가 어렵고 한 번 뽑으면 평생 책임져야 하는 구조에서 국내 채용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게 대부분 기업의 생각이었다”라고 전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희망퇴직마저 법으로 막겠다고 공약해 출구조차 막혀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경직된 노동유연성이 오히려 일자리의 해외 이전을 부추긴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동아일보가 국내 22개 주요 기업 및 그룹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비롯해 청년 신규 일자리 확충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을 물었을 때 일제히 ‘고용 유연성 확대’를 꼽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 “사람 뽑는 게 미래의 리스크” 우려

국내외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기업들은 신규 채용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22개 주요 기업 중 31%(7곳)는 한 해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까지도 올해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했다. ‘국내외 경제 및 업종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이라는 곳이 3곳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성장 정체 등 회사 내부 어려움(2곳), 통상 임금·최저임금 등 인건비 증가(1곳) 등을 각각 이유로 꼽았다.

한 대기업 인사 전문가는 “미국처럼 경영 환경이 안 좋아졌을 때 ‘레이오프(lay off·일시 해고)’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경영환경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이라며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업종일수록 사람을 뽑는 게 ‘미래의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미 채용 계획을 세웠다는 15개 기업 중 전년보다 채용을 늘리겠다는 곳은 SK, LG, 포스코, KT, 한진, 현대백화점 6곳뿐이었다. 나머지 9곳은 전년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청년 일자리 확대를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을 묻는 질문에는 전체 기업의 63.6%(14곳)가 ‘인력 구조조정 등 고용 유연성 확대’를 꼽았다. 이어 ‘고용 기업 대상 세제 지원 확대’(6곳), ‘투자 관련 규제 완화’(2곳) 순이었다. 기업들은 최근 정부가 주문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확대를 위한 조건으로도 ‘고용 유연성 확대’(50%)를 가장 많이 꼽았다.

○ “정규직 전환, 신규 채용에 영향”

최근 1년 새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기업은 22곳 중 14곳으로, 이 가운데 3곳은 “새 정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예정에 없던 전환을 했다”고 했다. 예정에 없던 1000명을 정부 정책 방향에 맞춰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한 기업은 “전환 비용이 예상했던 수준보다 많다”고 했다. 400여 명을 최근 전환했다는 한 기업은 “추가로 올해 15억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며 “업종 및 직종별 특성을 반영한 정규직 전환 기준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신규 채용에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는 8곳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한정돼 있는 일자리를 두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신규 채용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얘기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이미 채용 시장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고려했는데, 밖에 줄 서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한다”며 “저성과자 해고 등 고용유연성 기준만 명확해져도 기업들이 비정규직보단 정규직 채용을 선호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 일자리 정책이 채용 계획에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는 1개 회사를 제외한 21곳이 모두 ‘일부 미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 방향과 기업 요구 간 간극은 컸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자리를 늘리고 싶다면 회사와 노조 간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며 “파업권만큼 기업의 경영·조업권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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