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 어느 대기업 신입사원의 눈물
■ 사장님께 한 말씀 드립니다
일하는 딸들을 위해 손주 육아에 나선 외할머니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기업들의 상조 지원은 외가에 인색하다. 동아일보 DB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 손에 자라신 분들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올해 31세인 전 네 살 때부터 14세 때까지 10년을 대구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엄마였습니다. 수저통을 두고 학교에 간 저를 위해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교문 앞까지 달려오시던 모습, 외할머니표 간식인 조청 찍은 찐 떡을 제 입에 넣어주시며 환히 웃으시던 모습…. 제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엔 늘 외할머니가 계십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여자친구에게 전화할 카드를 조금씩 아껴 매주 할머니께 전화했죠. 엄마보다 외할머니가 더 애틋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마음이 한순간에 푹 내려앉더군요. 회사가 ‘외조부모상은 상으로 치지 않는다’며 상조휴가를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친조부모상에는 유급휴가 3일에 화환과 장례용품, 상조 인력과 조의금이 지원되지만 외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친가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장례에조차 유급휴가가 나온다던데 외조부모 장례는 가볼 수조차 없다니 대체 말이 되나요.
전 간신히 이틀의 연차를 내 장례식장에 갔지만, 셋째 날 업무 때문에 복귀하란 연락을 받고 발인도 보지 못한 채 출근해야 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10대 그룹 중 6곳이 상조복지 제도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다.
■ 현실과 동떨어진 상조정책
어린이집 등원 시간인 오전 8, 9시 무렵 전국의 주택가 인근 거리에는 직장에 간 엄마를 대신해 손자 손녀의 유모차를 미는 ‘할마’ ‘할빠’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에 따르면 매일 아침 손주의 유모차를 미는 전국의 할마 할빠 셋 중 둘이 ‘외조부모’다. ‘친정으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시댁보다 두 배나 많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직장맘 윤지영(가명·39) 씨네 집도 마찬가지다. 윤 씨는 “아이를 낳고 시댁에 육아 도움을 요청했더니 ‘육아는 네 몫이니 친정 부모에게 여쭤봐라’라고 말하더라”며 “시부모님이 늘 ‘우리 새끼 승준이(가명)’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상 승준이를 지금까지 키운 건 친정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외가를 더 가까운 가족으로 느끼는 한국 사회의 문화가 생긴 지 오래지만 기업들의 상조 정책은 여전히 친가 위주를 못 벗어나고 있다.
동아일보가 국내 10대 그룹의 상조 지원 현황을 알아본 결과 이 중 6곳이 휴가일수, 조의금, 지원 물품 등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친조부모상에는 5일의 상조휴가와 장례용품을 지원했지만 외조부모상에는 2일의 휴가만 지원했다. SK이노베이션과 GS는 친조부모상에 3일의 휴가와 조의금을 지급하는 반면, 외조부모상에는 딱 하루의 휴가만 줬다. LG화학과 롯데제과는 친조부모상에 상조휴가 3일, 조의금, 장례용품을 지급하면서도 외조부모상에는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B사 인사팀 관계자는 “외손주는 상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차등을 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조차 “요즘같이 비혼자가 많고 자녀가 한둘인 시대에는 외손주가 상주가 되는 경우도 많다. 고칠 필요가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건 친족 제도의 잔재를 그대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라며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된 만큼 기업들의 문화적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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