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흰옷을 즐겨 입은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인 시장의 모습을 흡사 솜밭 같다고 했다.
나라에서는 흰옷 입는 풍습을 골치 아파했다. 평상복과 상복의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했다. 세종대왕은 노란 옷은 중국에서 흉복(凶服)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푸른 옷을 입으라고 했다.
염색한 옷은 부(富)의 상징이었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부자들이 화려한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바람에 염색 값이 치솟았다고 한다. 가격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우리나라 염색 기술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송나라 사람 왕운의 ‘계림지’에 따르면,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특히 홍색과 자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조선의 자주색 비단에 반해서 10필 넘게 염색해 간 중국 사신도 있었다.
염색은 염모(染母)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맡았다. 고종 때의 재정백서 ‘탁지준절’에 따르면, 염모에게는 수공포(手工布)라고 하는 수공비를 지급했다. 비단 1필(20m)을 염색하면 삼베 석 자 다섯 치를 끊어준다. 비단 10필을 염색해야 삼베 1필이 될까 말까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인 염색의 대가치고는 많지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감지덕지였다.
호조(戶曹)의 아전 김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근무하는 동생의 집에 갔더니 마당에 큰 물동이가 줄지어 있었다. 김수팽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생이 말했다. “아내가 염색업을 합니다.” 김수팽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우리 형제까지 염색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느냐?” 김수팽은 물동이를 모두 엎어버렸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