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문이 키운 명곡-명반
1934년 1월 3일자에 실린 동아일보 신춘문예 유행가 부문 당선작 ‘서울노래’. 그해 5월 콜럼비아사에서 음반으로 발매됐다. 동아일보DB
김문성 국악평론가
신문의 예술 후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각종 명창대회나 성악공연처럼 대규모 행사를 주최·후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 음악을 지킬 목적으로 음반사와 연계해 노래로 만들어 보급하는 일에도 관여합니다. 언론이 명반·명곡 탄생에 기여한 셈이죠. 첫 결실은 동아일보의 1932년 신춘현상 모집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민족의식 고취 차원에서 아예 ‘조선의 노래’라는 주제를 정하여 가사를 공모했으며, 1932년 현제명이 곡을 씁니다. 그리고 1933년 연희전문 사중창단의 목소리로 콜럼비아 레코드에 취입됩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로 시작하는 조선의 노래가 크게 성공하자 타 언론사들도 공모 붐에 동참합니다. 1934년 조선일보의 향토찬가 가사 현상 공모에 당선된 문일석의 ‘목포의 노래’는 이듬해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의 신민요 ‘목포의 눈물’로 만들어지며 대유행을 합니다.
하지만 신문의 후원은 일제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유행가 부문에 당선된 조명암의 ‘서울노래’가 대표적입니다. “한양성 옛터전 옛날이 그리워라”로 시작하는 서울노래는 “무궁화 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앞남산 봉화불도 꺼진 지 오랩니다” “아세아의 바람아 서울의 꿈을 깨라”라는 가사에서 짐작되듯 표면적인 정서는 옛 서울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내면에는 상당한 저항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동아일보에는 3절의 첫 2행이 삭제된 채 실립니다. 검열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항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사였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입니다.
김문성 국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