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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뭍에 온 제주 해녀들… 뭇 총각 애간장 녹여

입력 | 2018-04-1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니들이 바다를 알아?” 역사, 문화, 의식주 등 어촌의 모든 걸 조사·연구한다고 자부하는 학예연구사로서 가끔 지인들에게 이런 농담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어촌과 바다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경남 남해 출신이니까. 하지만 2013년 고향 남해 물건마을을 시작으로 어민들과 사계절을 함께 지내며 느낀 바닷가는 흥미로운 것, 모르는 것의 보고였다. 관찰자의 세밀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몰랐던 것이 보였다.

2013년 강원 삼척 갈남마을로 향했다. 동해안 무인도 중에서 유일하게 갈매기가 알을 부화한다는 ‘큰섬’을 끼고 있는 어촌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투명한 거울을 뚫고 나온 듯한 기암괴석이 외지의 연구자를 반겼다. 마을에 도착하자 또 다른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검푸른 물결 위에 까만 점이 수면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겨울 칼바람 속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이었다. ‘근데 동해안에 웬 해녀? 제주도도 아니고….’

물질을 마치고 나와 모닥불로 몸을 녹이는 해녀 할머니들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항구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핀잔이 돌아왔다.

“추워죽겠는데 성가시게 뭘 찍어.”

할머니들의 기세에 눌린 백면서생은 한쪽 귀퉁이에 망부석처럼 굳어 서 있었다. ‘아, 이분들과 1년 내내 함께 지내야 하니 나는 죽었구나.’ 첫날부터 맥이 쭉 빠졌다.

‘그런데 이 할머니들 말투가 이상하네.’ 알고 보니 이분들은 ‘해녀 사관학교’인 제주도 출신이었다. 이른바 출가 해녀. 출가 해녀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와 삶의 터전을 마련한 해녀를 이르는 말이다. 제주 해녀가 현재 4000명 정도인데, 육지에 정착한 출가 해녀도 4000여 명에 이른다.

출가 해녀의 역사는 이렇다. 강점기에 일제는 제주 해녀를 뭍으로 ‘공수’했다. 해녀들을 동원해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우뭇가사리는 군수물자였던 공업용 아교와 일본인이 좋아하는 간식인 양갱의 주재료였다.

6·25전쟁으로 잠시 중단됐던 제주 해녀의 ‘상륙작전’은 1950년대 중반 재개됐다. 육지에는 미역, 전복을 딸 해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 해녀들도 쏠쏠한 돈벌이를 마다할 리 없었다. 갈남마을을 비롯해 동해안 어촌 남성들은 매년 2월이면 해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제주로 향했다. 남성 1명이 10∼15명의 해녀를 인솔해 육지로 나왔다. 해녀를 모집해 마을로 데려오는 사람을 ‘해녀 사공’이라고 했다. 사공은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의 10%를 수수료로 챙겼다. 나머지 90%는 해녀의 몫이었다.

사공을 따라 뭍으로 온 10대 후반∼20대 중반 해녀들은 3월에서 추석 전까지 해산물을 채취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1960, 70년대 동해안 어촌에는 적게는 30, 40명, 많게는 100명 이상의 제주 해녀가 들어와 생활했다. 이들은 3∼6월 미역을 채취했고 추석 전까지 전복, 소라, 성게, 문어를 잡았다.

물질을 끝낸 해녀들은 저녁이면 자연스레 마을 총각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같은 마을을 찾다 보면 남녀 간에 묘한 감정이 싹트는 게 자연스럽다. 정이 쌓였지만 해녀들은 추석 무렵이면 제주로 가야 했다. 서로를 그리워하던 육지 총각과 제주 해녀는 혼인해 하나둘 동해에 정착했다.

박씨 할머니는 제주 출신이지만 원래 해녀는 아니었다. 친구가 삼척에서 물질할 때 잠깐 놀러왔다가 동네 청년과 사랑에 빠져 삼척에 정착했다. 제주와 삼척을 오가며 몇 년째 물질하던 김씨 할머니도 1974년 삼척 총각과 결혼했다. 김 할머니는 “친구 꾐에 빠져서 왔지, 저 영감 보고 삼척까지 왔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주에서 친구로 지내던 두 할머니는 삼척까지 인연을 이어오며 평생을 함께하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이렇게 1960년대 중후반∼70년대 초반 갈남마을의 청년과 결혼해 정착한 해녀들은 지금도 삼척 바다를 주름잡고 있다.

맨몸으로 제주를 떠나 삼척에 정착한 이들은 50년 동안 물질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냈다. 마을 해변에서 가장 높고 좋은 집은 한결같이 출가 해녀들의 집이다. 이제는 쉬어도 될 나이지만 할머니들은 지금도 바다로 향한다. 물 밖에 있으면 온몸이 아프다가도 물에 들어가면 편안해진단다. 끊임없이 해산물을 내어주는 바다가 있는 한 일흔을 넘긴 할머니들은 물속에서만큼은 청춘이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학예사가 어촌을 조사·연구한 내용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김 학예사는 어민들과 수년간 함께 지내며 참여관찰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