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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가족 걱정만 하던 딸, 집 떠날때 말릴걸…”

입력 | 2018-04-16 03:00:00

‘세 여친 살해 의혹 30대’에 희생된 여성 부친의 눈물




지난해 12월 21일 오전 8시경 정모(가명·55) 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정민지(가명·24·여) 씨 부모님이시죠? 민지 씨가 사고가 났습니다.”

서울의 경찰관이었다. 더 이상 설명은 없었다. 그저 “서울에 오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는 딸에게 “무슨 일 있느냐”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없었다. 회사와 지인에게 “서울에 있는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갔다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나 배터리가 없어. 충전하고 전화할게”라는 카톡 메시지가 왔다. 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시간에 민지 씨는 살아 있지 않았다. 이틀 전 최모 씨(31)에게 살해당했다. 최 씨가 민지 씨를 살해한 뒤 휴대전화를 훔쳐 달아났다가 정 씨에게 대신 답장을 보낸 것이다.


1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만난 정 씨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향했다. 말끝마다 한숨이 따라붙었다. 그는 민지 씨 살해 사건의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3, 4시간 걸려 서울로 올라왔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정 씨는 이날 공판에 나왔지만 정작 최 씨는 ‘몸이 아프다’며 출석하지 않았다. 최 씨는 민지 씨가 지난해 6월 뇌출혈로 사망한 여자친구의 욕을 해서 죽였다고 주장했다.

공판을 마친 뒤 정 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내 탓인 것 같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딸은 성인이 된 뒤 “대학을 휴학하고 공장에 다니겠다”며 독립했다. 정 씨는 딸의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딸에게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정 씨는 그날의 결정이 뼈에 사무친다. 민지 씨는 서울에 간 뒤 매달 100만 원씩 적금을 넣었다. 부모님 생일이면 용돈을 거르지 않았고 통화 때마다 자신보다 늘 가족 걱정만 했다고 한다. 타지에서 혼자 사는 딸을 걱정했지만 믿음이 있었다.

민지 씨가 죽은 뒤 정 씨의 삶은 지옥이 됐다. 빈소를 차렸지만 차마 딸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장례를 치른 뒤 남은 가족은 거실에 모여 잔다. 정 씨는 “혼자 있으면 민지가 죽을 때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잠들지 못한다”며 눈물을 훔쳤다.

숨지기 일주일 전 민지 씨가 가족에게 연락했다. 민지 씨는 “부모님이 죽는 꿈을 꿨는데, 찾아보니 길몽이어서 너무 안심이 됐다.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라고 말했다. 정 씨는 “로또라도 사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김정훈 hun@donga.com·황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