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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에빙하우스와 망각 곡선

입력 | 2018-04-18 03:00:00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었다.”

T S 엘리엇(1888∼1965)의 장편시 황무지(1922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을 표현한 시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가 사랑한 사람(장 베르드날)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4월에 죽었는데, 4월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온 세상은 눈부신 생명들로 되살아나고 있다면, 그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겠지요.

잔인한 기억은 잊고 싶겠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4주년이었습니다. 기억할수록 아픔이 더해 오지만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한 추모의 발길이 온종일 이어졌습니다. 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의 진실은 바다 깊이 잠긴 채 시간은 그날로 멈춰 섰습니다. 노란 리본이 흩날리는 팽목항의 4월 역시 가장 잔인한 달입니다.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4월이 잔인한 달입니다. 시험을 마주하기 때문이지요. 오죽하면 학생들은 개나리의 꽃말을 중간고사라 할까요. 학생들은 공부한 내용을 까먹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1850∼1909·사진)의 망각 곡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합니다. 학습 후 10분이 지나면 망각이 시작되어 1시간 뒤 50%, 하루가 지나면 67%, 한 달 후엔 80%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래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망각의 정도가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주 어느 야당 대표는 전직 대통령 탄핵에 적극 반대했던 인사들을 지방선거 후보로 영입했습니다. 당시 그 당이 탄핵에 찬성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겁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재판 1심 선고 직후 야당 대표는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공주를 마녀로 만들어 버렸다’며 박 전 대통령을 감쌌습니다. 탄핵 당시 ‘춘향이인 줄 알았더니 향단이였다’고 말하며 탄핵된 대통령을 출당 조치한 장본인이 불과 5개월 만에 망각한 겁니다.

작년 5월 19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올해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야당은 느닷없이 개헌을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망각이라면 에빙하우스의 이론을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정치인들의 손바닥 뒤집기 식 망각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그저 어리둥절합니다.

보통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망각을 쉽게 합니다. 위안부 원죄를 잊고 싶어 하는 일본이 그렇습니다. 과거는 망각한다고 지워지지 않습니다. 망각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지도 않습니다. 잊어야 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법입니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안하무인과 갑질이 반복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쉽게 잊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4월은 참 곡절이 많은 달입니다. 제주의 4월 3일은 유채꽃마저 슬프게 만든 날입니다. 4월 11일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이 이국땅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입니다. 내일은 목숨 걸고 독재의 사슬을 끊어낸 민주 혁명의 날 4·19입니다. 활짝 핀 4월의 꽃들은 우리에게 슬픔이기도 하고 분노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은 그렇게 또 흘러갑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국어대부설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