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서울]<5> 김선숙씨의 창신동 재봉사 삶
열아홉에 서울 종로구 창신동으로 와서 30년째 재봉사로 일하는 김선숙 씨가 18일 자신과 동료들이 만든 옷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씨가 운영하는 봉제공방 창문 너머로 창신동 한 자락이 보인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반나절을 달려 서울역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정류장, 종로구 창신동. 두 살 많은 언니가 실밥을 머리 여기저기 붙인 채 모녀를 반겼다. 언니가 건넨 크림빵을 한 손에 쥐고, 언니가 일하는 봉제공장 ‘해진사’로 향했다.
해진사까지 걸어가며 받은 첫인상은 ‘지저분하다’였다. 서울은 모든 건물이 깨끗하고 번쩍번쩍할 줄 알았다. 천 쪼가리가 굴러다니는 골목에는 오토바이만 즐비하고 남자들은 담배를 피워댔다.
서울 낙산 아래 창신동은 근처에 1961년 평화시장, 1971년 동대문종합시장이 생기며 빠르게 변했다. 이들 시장에서 파는 옷을 만들던 봉제공장들이 종로에서 임차료 싼 이곳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다세대주택 1층과 반지하를 개조해 작업장을 만들었다. “물건이 없어 못 판다”는 1970, 80년대는 봉제업 전성기였다. 한창 때 봉제공장은 1만 개를 넘었다고 한다.
김 씨처럼 대학 갈 형편이 못 되는 집 아들딸들이 모여들었다. 김 씨는 스스로를 ‘공순이’라고 표현했다. 구로공단 여공들만 공순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밤낮없이 일했다. “작업대 옆 간이침대에서 하루 네댓 시간 쪽잠을 잤어요. 하루 평균 14시간 일하면서 버티다 못해 나가는 공순이들이 많았지요.” 심야 잔업에 졸다가 재봉틀 바늘에 손을 찔리기 일쑤였다.
김 씨는 남들보다 1년가량 빨리 미싱사가 됐다. “밤에만 겨우 미싱을 돌릴 수 있었는데 그게 안쓰러운지 오야 언니가 기술을 조금씩 알려줬어요.” 쉬는 날이면 걸어서 10여 분 걸리는 동숭동 대학로에 갔다. 자신이 만든 잘 빠진 정장을 입고서. 당시 주말이면 대학로는 차를 통제하고 대학생들이 놀았다. 정장을 입으면 공순이가 아닌 것 같았다. “높은 구두를 신고 놀러온 여대생들 눈에 공순이로 보이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얼마 뒤 해진사를 나와 서너 군데 공장을 돌며 몸값을 올렸다. 2011년 3월, 창신동에 온 지 23년 만에 재단사 남편과 65m² 크기 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시장 상인과 디자이너들은 값싼 중국이나 동남아에 일을 맡겼다. 일감은 갈수록 줄었다.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창신동은 2013년 6월 뉴타운지구에서 해제됐다. 다른 지역이 신도시를 원할 때 주민들은 보전을 원했다. 지난해 도시재생뉴딜사업지로 선정돼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되살릴 계획이다.
공장 문은 닫았지만 재봉틀에서 손을 놓을 수 없던 김 씨는 30m²짜리 공방을 열었다. 일반인들에게 재봉틀 기술을 알려준다. 그 같은 베테랑 봉제인들이 작은 공방을 여는 추세다. 골목 곳곳에는 ‘봉제용어 8가지’ ‘봉제공장의 24시간’ 같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찾는다. 최근에는 봉제박물관 ‘이음피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 디자인을 맡았던 오준식 디자이너는 “한국 패션산업은 창신동 봉제인의 희생에 많이 기대고 있다”고 말했다. 18일 오전 창신동 골목에서는 여전히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가 요란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