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모시기’에 사활 건 고교들
지난해 ‘80년 안국동 시대’를 마감하고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한 풍문고의 김길동 교장이 옛날 졸업앨범을 들고 운동장에 섰다. 학교 운동장이 학생으로 꽉 찬 앨범 속 사진은 1970년대 풍문여고 모습이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서울 강남구 수서역에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하자 운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되물었다. 기본요금 거리인데도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었다. 풍문고의 옛 이름은 풍문여고다. 1937년 종로구 안국동에서 여고로 개교했지만 80년 만인 지난해 3월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남녀공학이 됐다. 도심 공동화로 종로구에서는 학생 모집이 더 이상 어려워지자 내린 결정이었다.
‘저출산 쇼크’가 서울 도심 한복판 고등학교에까지 들이닥쳤다. 연간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50만 명 밑으로 떨어진 2002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올해 고1이 됐다. 고교들은 생존을 위해 학생 모집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신축한 풍문고 교실의 책상 간격은 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널찍했다. 맨 뒷줄 학생과 칠판까지 거리는 불과 열 걸음. 학교가 칠판과 책상 간 거리를 최대한 가깝게 설계했다. 통학거리가 먼 학생과 학교에서 24시간 관리받기를 원하는 학생을 겨냥해 일반고로는 드물게 기숙사도 지었다.
1988년 2000여 명이던 풍문고 학생 수는 2015년 962명으로 줄었다. 그해 학교 이전이 결정되자 통학거리가 멀어진 학생들이 대거 전학가면서 지난해 학생은 530명으로 더 떨어졌다. 올해는 614명으로 반등했다. 풍문고 김길동 교장은 “많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공을 들였다”며 “수서역 인근 재개발이 예정돼 있어 앞으로 학생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학생을 찾아 터전을 옮긴 학교는 또 있다. 1944년 서울 중구 명동에 개교한 계성여고는 학생 유치를 위해 2016년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전했다. 신설 학교는 남녀공학이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계성여고도 남녀공학인 계성고가 됐다.
○ 다문화가정 학생 유치에 공들이는 학교
서울 강서구 소재 일반고인 한광고 교사들은 매년 용산구 이태원동과 한남동 인근 중학교 위주로 학교를 홍보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유명 혼혈모델 한현민 군(17)과 배유진 양(15)이 이곳에 재학 중이다. 또 체육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을 겨냥해 국어 영어 수학 등 수업은 오전에 하고, 오후에는 개인 연습과 훈련이 가능하도록 ‘체육중심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이 넘치던 과거에는 일반고에 갈 성적이 안 되거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 위주로 정원을 채웠다. 하지만 최근 일반고는 물론이고 특성화고까지 학생 모집에 열을 올리면서 선발 방식이 불리한 한광고는 학생 모집이 더욱 어려워졌다. 한광고 입학생은 지난해 83명으로 서울 일반고 중 꼴찌였다. 올해는 45명으로 더 줄었다.
올해부터 일반고와 동시에 학생을 선발해야 하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외국어고도 학생 모집에 비상이 걸렸다. 앞으로 자사고나 외고에 지원했다 떨어지면 일반고 배정에 불이익을 받게 돼 지원 감소가 예상된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상위권 외고와 자사고만 살아남을 것”이라며 “수도권 소재 한 외고는 물밑에서 인수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학생이 더 줄면 모둠활동 등 수업 자체를 진행하기 어려울뿐더러 교우 관계도 좁아지고 급식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의 한 사립고 교장은 “학생이 줄어도 교사는 자르기 어려워 교사가 고령화되고 수업 질도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더 심각한 건 저출산 쇼크가 ‘신(新)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내신 성적을 잘 받으려면 학생 수가 많은 학교에 다녀야 유리한데, 이런 학교는 교육 인프라가 좋은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와 양천구 노원구에 몰려 있다. 다른 지역은 학생이 더 빠른 속도로 줄어 교육 인프라가 황폐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영대 한양대 교육복지중점연구소 교수는 “학교가 부족한 곳은 계속 부족하고, 남는 곳은 계속 남는 지역 간 불균형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앞으로 학생 수가 더 줄면 오히려 교육 환경이 악화될 수 있다”며 “저출산 사회에 맞도록 교육시스템 전반을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