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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p Of Life, 나의 월드컵] ⑤ 하석주 아주대 감독 “멕시코전 백태클, 지금도 굉장히 아프다”

입력 | 2018-04-27 05:30:00

하석주 아주대학교 감독은 10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무대를 2차례나 밟은 한국축구의 레전드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1998년 프랑스월드컵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다. 선수시절을 통틀어 딱 한 차례뿐이었던 레드카드가 불운의 씨앗이었다. 그로 인해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수원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94미국월드컵·98프랑스월드컵 무대 누빈 ‘왼발의 달인’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 골 찬스 놓쳐…독일전 결장 자청
佛월드컵 멕시코전 프리킥 골 직후 퇴장은 ‘천추의 한’
선수생활 유일한 레드카드 퇴장, 극심한 부담감 낳아
2000년 한일전 결승골은 못 잊어…“하늘 나는 기분”
아주대 U리그 평정이 우선…“학교 전폭 지원에 든든”
“국가대표 사령탑? 연령별 대표팀부터 차근차근 거쳐야”


1994년 미국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축구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16강의 벽은 변함없이 높았지만,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희망과 절망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을 차례로 만난 미국에선 2무1패, 4득점5실점으로 앞선 2차례 월드컵(1986년 멕시코·1990년 이탈리아)보다 진일보한 경기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를 잇달아 상대한 프랑스에선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대회 도중 사령탑 경질이라는 사상 초유의 아픔도 맛봤다. 지금은 모교 아주대학교 사령탑으로 변신한 하석주(50) 감독은 그 극과 극의 현장 모두에 있었다. 스피드, 돌파(드리블), 킥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왼쪽 윙백이자 ‘왼발의 달인’으로 평가받았던 그에게 미국월드컵과 프랑스월드컵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을까.

미국 월드컵 예선 당시 하석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의 기적’ 당시(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북한을 상대로 3-0 쐐기골을 넣고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심정은 어땠나? 또 경기 종료 직후까지도 월드컵 본선행이 좌절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일본이 이라크와 2-2로 비겼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현장 분위기도 설명해달라.

“일본에 0-1로 져서 자력으로는 본선에 갈 수 없었다. 일본(2승1무1패·승점 5)은 무조건 올라가고 우리(1승2무1패·승점 4)는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과연 그 기적이 일어날까 회의적이었다. (최종예선 출전 6개국 선수단이) 같은 숙소를 썼는데, 일본 선수들은 호텔 소파에 편하게 앉아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반면 우리는 밥을 먹을 때도 분위기가 무겁고 삭막했다. 마지막 1% 가능성이라도 살리려면 득실차까지 고려해 북한에 많은 골을 넣고 이겨야 했다. 첫 골이 터졌을 때는 벤치에서 환호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골 때도, 내가 오른발로 세 번째 골을 넣었을 때도 벤치 분위기는 어두웠다. 벤치 분위기로 그쪽(일본-이라크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기고도 다 고개 숙이고 인사하는데, 갑자기 벤치에서 만세를 부르더라. 일본이 막판에 동점골을 내주고 비겼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모두 껴안고 엉엉 울었다. 경기 후 식사 때 기차놀이까지 하며 기쁨을 나눴다.”

-미국월드컵 때는 교체로만 2경기에 출전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개인적으로는 볼리비아전(0-0 무) 추가시간에 내가 득점할 수 있었는데 놓쳤던 게 안타깝다. 넣었으면 16강에 오를 수도 있었다. 스페인전(2-2 무)은 서정원의 동점골 뒤에도 이길 찬스가 있었고, 독일전(2-3 패) 때는 전반에 쉽게 3골을 내줬지만 후반에 잘 싸웠다.”

-독일전은 벤치에서 지켜봤는데, ‘역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나? 후반에는 독일을 쩔쩔 매게 했다.

“볼리비아전에서 그 골을 넣지 못한 게 큰 스트레스가 됐다. 주로 조커였는데, 독일전 때도 후반에 나갈 예정이었지만 감독님(김호)을 찾아가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으니 빼달라’고 말씀 드렸다. 날씨가 굉장히 더웠다. 독일은 그런 날씨에 (경기를) 해본 적이 없는 팀이지만 우리는 달랐다. 후반에 독일 선수들이 퍼지는 게 보였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동점에 역전까지 갈 수 있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백태클로 퇴장 당한 하석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프랑스월드컵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회한이 많을 듯하다. 멕시코전(1-3 패) 전반 27분 프리킥 득점은 한국의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선제골이었다. 그러나 3분 만에 백태클로 퇴장 당했다. 백태클에 대해 퇴장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기로 한 뒤 첫 사례였는데, 나중에 한국이 억울하게 첫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도 많았다.

“딱 20년이 지났다. 지금도 물어보시는 팬들이 많은데, 사죄의 의미에서라도 잘 설명해드리려고 한다. 어쨌거나 내 잘못이 크다. 당시 백태클 퇴장 규정이 처음 시행돼서 그런지 앞선 다른 조의 경기들을 보면 백태클에 대해 경고도 없었고, 선수들끼리는 혼란스러워하던 상황이었다. (백태클 당시) 골을 넣고 흥분했다기보다는 에너지가 넘쳤다. 퇴장을 당하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해 은퇴할 때까지 그게 유일한 퇴장(레드카드)이었다.”

-벨기에전(1-1 무)에선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다. 한국이 얻은 2골에 모두 관여했다.

“원래 퇴장은 다음 2경기 출장금지인데, FIFA(국제축구연맹)에서도 판정에 미스가 있었다고 판단했는지 1경기로 줄여줬다. 네덜란드전(0-5 패)은 벤치에서 지켜보는데 차마 볼 수가 없더라.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많이 들었다. 네덜란드전이 끝나고 차범근 감독님이 경질돼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벨기에전 때는 너무나 겁이 났다. 퇴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몸싸움도 못하겠더라. ‘만회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팀에 또 누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당시 하석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프랑스월드컵 때가 전성기였나?

“최종예선 때는 기자단이 선정한 MVP(최우수선수)가 됐고, 나이로도 전성기를 열 수 있는 서른한 살이었다. 몸도 굉장히 좋았다. 또 차범근 감독님까지 ‘왼발의 달인’이라고 칭찬해주셔서 자신감이 넘쳤다. 프랑스로 가면서 스스로 기대도 컸다. 하지만 첫 경기부터 해볼 만한 상대 멕시코한테 그런 상황(백태클로 인한 퇴장)이 돼버렸으니까 지금까지도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멕시코전의 트라우마 때문에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2002년 월드컵까지 뛸 수는 없었나?

“프랑스월드컵을 마치고 대표팀에서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기자들한테도 얘기했다. 하지만 많은 팬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래서 대표팀 생활을 계속했고, 2000년 한일전(1-0 승) 때는 결승골을 넣고 MVP도 됐다. 히딩크 감독님이 오셔서도 이집트 원정경기(2001년 4월·2-1 승)에서 골을 넣었지만, 박항서 코치님께 ‘제가 2002년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 드렸다. ‘이영표 같은 후배들이 올라와 잘하고 있으니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2000년 하석주에서 멋진 결승골을 기록한 하석주.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2000년 한일전 결승골은 정말 멋졌다. 국가대표로 자신이 터트린 베스트 3골을 뽑는다면?

“최고로 기억에 남는 골은 대표팀에 데뷔한 대통령배 결승전(1991년 6월 16일·이집트전·2-0 승)의 다이빙 헤딩골이다. 4골로 득점왕과 MVP도 차지했다. 누구든 처음이 가장 기억에 남지 않나. 촌놈이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상을 받아서 정신이 없었는지, 한 팬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상금이 들어있던 봉투를 잃어버렸다. 다행히 나중에 어떤 사람이 봉투를 가져다줬다(웃음). 또 하나는 마라도나 초청경기 때(1995년 9월 30일) 비록 우리가 1-2로 졌지만, 잠실에 그 많은 관중이 꽉 찬 상태에서 다이빙 헤딩슛으로 넣은 골이다. 마라도나가 (미국월드컵 약물파동 후) 복귀한 뒤 첫 경기라 외신기자들도 무척 많았다. 2000년 한일전은 양쪽 모두 ‘지면 사령탑이 경질된다’는 아주 어려운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당시 나는 종교가 없었는데도 모든 신에게 ‘오늘 이 경기에서 98년 월드컵에서 내가 진 빚을 갚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경기에 임했다. 1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께도 간절히 빌었다. 김태영이 (후반 27분) 퇴장당해 수적으로 불리한 가운데 25m 정도 거리에서 왼발 아웃사이드로 잘 걸렸고, (하늘의 도움 덕분인지) 수비수의 몸도 피해 왼쪽 골대를 맞고 들어갔다.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상적이라면 들어갈 골이 아니었다.”

-모교 감독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성적이 나쁘지 않은데도(2014시즌 K리그1 최종 7위) 프로(전남) 사령탑 자리를 박차고 아마추어 지도자로 복귀하는 일은 흔치 않다.

“6위 안에 충분히 들 수 있었는데, 인천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우리 선수 3명이 뽑혔다. 주변에선 좀 줄여달라고 요청하라 했는데, 과감히 다 보내줬다. 전남과 한국축구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그 선수들이 돌아왔지만, 많이 지친 상태여서 경기력이 나오질 않았다. 우승을 한 것도 아닌데 고맙게도 구단에선 연봉을 1억원 올려서 재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집안일이 힘들었다. 어머니는 양양에 홀로 계시고, 안사람은 혼자 아들 셋을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언제까지 기다려주실지 모르는 일이고, 안사람과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 여러 날 고민했다.”

아주대 하석주 감독. 수원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지도자라면 누구나 국가대표팀 사령탑이 꿈일 텐데.

“우선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아주대) 이사장님도, 총장님도 인조잔디축구장을 2개면이나 마련해주시고, 늘 많이 지원해주신다. 프런트(축구부 지원인력)도 16명이나 되고, 프로팀 같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아마추어축구를 살리고, 우리(아주대)가 대학축구에서 선구자 같은 역할을 해보고자 한다. ‘U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뒤에 내 진로를 고민해보겠다’고 학교에 말씀드렸는데,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다보니 연령별 대표팀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차분히 올라가보고 싶다.”

-올해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할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걱정하기보다는 희망적으로 본다. 만약 이탈리아가 (유럽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스웨덴을 꺾고) 올라왔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스웨덴은 ‘선수비 후역습’을 펼치는데, 우리와 경기할 때는 공격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그러면 빠른 선수가 많으니까 우리가 역습을 펼치면 된다. 또 (꼭 승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쪽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역이용하면 우리가 더 유리하다. 멕시코는 분명 개인기는 좋지만 체격에선 우리가 더 낫기 때문에 항상 해볼 만한 상대다. 지금 멕시코의 전력도 그다지 좋지 않고. (조별리그 최종전 상대인) 독일은 생각하지 말고, 모든 전략을 스웨덴과 멕시코에 맞췄으면 한다. 국민들도 이제는 질타보다는 응원을 많이 해주셨으면 한다. 결과를 보고나서 질책해도 된다.”

아주대 하석주 감독. 수원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하석주 감독은?

▲생년월일=1968년 2월 20일(경남 함양 출생)
▲출신교=경신중~광운전자공고~아주대
▲프로선수 경력=대우(1990~1997년), 세레소 오사카(1998년), 비셀 고베(1998~2000년), 포항(2001~2003년)
▲프로 통산 성적=K리그 258경기·45골·25도움, J리그 82경기·13골
▲국가대표선수 경력=1991년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A매치 95회·23골)
▲주요 참가 대회=1994년 미국월드컵,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1998년 프랑스월드컵
▲지도자 경력=포항 코치(2004년), 경남 코치(2005~2007년), 전남 코치(2008~2010년), 아주대 감독(2011~2012년·2015년~현재), 전남 감독(2012~2014년)

수원 | 정재우 기자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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