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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기홍]도보다리의 두 사람

입력 | 2018-04-30 03:00:00


방음이 완벽한 유리벽 집무실. 보스의 방에 들어간 주인공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눈다. 직원들은 밖에서 두 사람의 입술과 표정만 초조하게 읽는다. 마침내 유리문이 열리고, 운명의 담판 결과가 공개된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투명하게 보이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 유리벽의 시각-청각 부조화는 관객에게 엄청난 몰입 효과를 일으킨다. 27일 오후 4시 42분∼5시 12분 판문점 도보다리가 바로 그런 공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50여 m의 도보다리를 단둘이 걷다 다리 끝 벤치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곤 30분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눴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봤지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려왔다. 마치 대형 유리구슬 속의 두 주인공 같았다. 봄 햇살이 부서지는 파란색 다리와 녹음(綠陰)은 더없이 선명한데, 주인공은 감색 정장과 검은 인민복 차림 두 남성이어서 더더욱 비현실적 영상 같았다.

▷판문점 인근에는 1953년 포로 교환이 이뤄진 ‘돌아오지 않는 다리’, 지난해 ‘오청성 귀순 사건’의 현장인 ‘72시간 다리’, 도보다리 등 3개의 다리가 있다. 도보다리는 중립국 감독위가 습지를 우회해 판문점 회담장으로 가는 불편을 덜기 위해 1950년대에 만들었다. 유엔사가 ‘Foot Bridge’로 부르는 걸 직역해 ‘도보다리’가 됐다. 난간 없는 일자형 다리였으나 이번에 난간을 만들고 군사분계선 표지물이 있는 곳까지 연장했다. 파란색을 칠했는데 유엔의 상징색이 하늘색인 데다 한반도기 색상도 염두에 뒀을 성싶다.

▷통역·경호원 없이 정상 단둘만의 30분 대화는 유례가 드물다. 흉금을 털어놓을 공간이 필요했고 실제 할 얘기도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함께 걸은 시간까지 총 43분간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영화의 결말은 유리문이 열리고 주인공이 걸어 나올 때의 표정과 첫마디로 예감된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논의의 결말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