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한다는 소식에 로비에 있던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카메라 앞에 선 아베 총리는 상기된 표정으로 “방금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했는데 납치 일본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했다고 들었다. 문 대통령의 성의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방일한 서훈 국가정보원장과의 면담을 위해 자리를 떴다.
일본에선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언급됐는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공동선언과 기자회견에 관련 내용이 포함되지 않자 피해자 가족회에선 “매우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 회담에서 거론됐다는 것 자체가 빅 뉴스였다. 일본 기자들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고 본사에 속보를 전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부적으론 학원 스캔들과 자위대 문서 은폐, 재무차관 성희롱 등 악재가 겹치며 궁지에 몰렸다. 외교안보 분야에선 ‘저팬 패싱’ 논란 때문에 언론에서 “일본만 모기장 밖에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난관을 타개하려면 아베 총리를 지금의 그로 만들어준 납치 문제에서의 진전이 절실하다. 한 일본인 교수는 “납치 피해자가 1, 2명이라도 돌아와야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지금 필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돌파구를 못 찾으면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꼼짝없이 총리직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한국 정부가 아베 총리의 재집권을 도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일본의 고민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는 있다. 향후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선 일본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을 되게 만드는 건 어렵지만, 안 되게 만드는 건 쉽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북한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일본이 민감하게 여기는 중·단거리 탄도미사일과 관련해 한국이 안보 면에서 일본과 같은 입장이며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확인하는 것, 그리고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을 측면 지원하는 것이다.
북-일 관계가 진전되면 북한은 예전의 한국처럼 일본으로부터 과거 청산 명목으로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최소 100억 달러(약 10조7000억 원)에서 최대 500억 달러(약 53조5000억 원)로 예상되는데, 북한이 이런 거액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일본뿐이다. 이 자금을 북한 내 낙후된 인프라 구축 및 재건에 활용한다면 한국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을 맞은 올해, 일본의 축하 속에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은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