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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10년만 본 父, 50년을 보는 子

입력 | 2018-05-02 03:00:00

주성하 기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북한 권력자가 탄 특별열차가 중국에 갔다. 집권 후 첫 중국 방문이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수뇌부를 만나 대남정책 선회 배경을 설명했다. 남북관계 개선으로 살길을 찾겠노라 역설했으리라.

이것은 2000년 5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 이야기다. 한 달 뒤 평양에선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 정상이 포옹했고 획기적인 6·15 남북 공동성명도 발표됐다. 지난달 27일 판문점에서 봤던 것과 판박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안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김정은의 파격도 아버지의 쇼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난 18년 전 김정일과 지금의 김정은 처지는 전혀 다르다고 본다.

김정은이 3월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길을 빨리 걸었어야 했는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면 김정일도 18년 전에 ‘북한의 덩샤오핑’이 되려고 결심했다. 그때는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라 절박함은 더 했을지도 모른다. 2001년 1월 상하이에 간 김정일은 푸둥지구, 증권거래소, 제너럴모터스 자동차공장, 농업개발구역을 차례로 돌아봤다. 그의 입에선 “중국이 천지개벽을 했다”는 극찬이 나왔다.

귀국한 김정일은 ‘신사고’를 주문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경제관리방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 획기적인 경제개혁인 ‘7·1경제관리개선 조치’가 발표됐다. 두 달 뒤인 9월 중국계 네덜란드인 양빈을 초대 행정장관으로 한 신의주특구개발계획도 발표됐다. 특구에 입법 행정 사법권을 모두 다 준 개방에 가까운 결단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김정일의 ‘덩샤오핑 되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나아가지 않고 얼마 뒤 주저앉았다. 중국이 국경에 마카오를 능가하는 거대한 도박 도시가 설 것을 우려해 양빈을 구속하자 김정일은 분노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낙인찍자 김정일은 좌절했다. 2004년 4월 김정일 암살 시도로 보도된 평북 용천역 대규모 폭발 사고가 터지자 그는 도입했던 휴대전화 서비스를 다시 금지했다. 이때쯤부터 북한은 7·1개혁 조치의 동력을 잃었다. 2004년 8월 부인 고용희마저 암으로 죽은 뒤부턴 김정일은 모든 의욕을 잃은 듯했다.

2006년 1월 그의 세 번째 중국 방문은 이를 입증해준다. 그때도 김정일은 대표적인 개방 지역인 광둥성과 후베이성에서 전자 첨단산업 현장을 둘러봤다. 중국이 대규모 경제협력도 제안했지만 김정일은 5년 전과 달리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한 가닥 가졌던 개혁의 의지가 이미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환갑을 넘겼을 때 김정일은 몸과 마음이 다 늙고 병들어 있었다. 그가 2008년 8월 뇌중풍으로 쓰러진 뒤 건강이 악화된 것처럼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50세 이후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아픈 사람은 만사가 귀찮은 법이다.

애초에 방향을 잘못 정한 북한이란 배가 이대로 가다간 경제난이란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을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키를 돌리지 않았다. 모름지기 그는 “내가 죽을 때까진 빙산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고, 10∼20년만 버티면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죽을 때까지 가진 것을 움켜쥐는 길을 선택했다. 지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북한은 침몰이 예고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김정일은 북한이 붕괴되기 전에 죽었다.

키를 넘겨받은 김정은은 아버지와 처지가 전혀 다르다. 그는 젊고, 자신만만하며 추진력도 있다. 무엇보다 최소한 50년쯤 더 선장을 해야 하는 처지다. 10세도 채 안 된 세 자녀의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더 멀리 봐야 할 것이다.

지금 갑자기 키를 돌려도 빙산을 피할 수 있을지, 배가 통제력을 잃어 전복되진 않을지 등 각종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대로 가면 침몰할 수밖에 없고, 키를 돌려야만 살 확률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바로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10년만 본 김정일과 50년을 내다봐야 하는 김정은의 근본적 차이이다. 난 김정은이 이번엔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김정은의 현명한 결단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