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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사회] ‘쿵’ 소리와 함께 사라진 집, 교실, 친구…한국에 둥지 튼 시리아 아이들

입력 | 2018-05-04 18:10:00

시리아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와서 대전에 살고 있는 소녀 마르와와 두 남동생의 한국 적응기


2014년 어느 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내전이 3년째 접어든 이곳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7세 소녀 마르와는 수업 중 ‘쿵’ 하는 굉음에 교실을 뛰쳐나왔다. 위층에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르와는 아래층에서 수업을 듣는 한 살 아래 남동생 파흐드가 걱정됐다. 같은 반 친구의 손을 잡고 펑펑 울며 동생의 교실로 함께 뛰었다. 달려가던 도중 마르와 손에서 친구의 손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친구는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마르와는 “친구 가슴에서 숨이 꺼졌다. 급히 선생님께 말했는데 선생님은 자기 걱정만 하며 달아나 실망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마르와에게 전쟁은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 버린 괴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엔 할아버지와 아빠가 공들여 지은 4층 집이 폭격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급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가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오니 마르와의 ‘보물 1호’ 고무 머리끈이 불에 녹아 거실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르와를 아끼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 선물이었다. 마르와는 전쟁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르와는 불에 탄 집에서 아빠 사진이 담긴 묵직한 유리 액자만 꼭 껴안고 나와 피란길에 올랐다. 한국에서 일하느라 3년 넘게 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을 기억할 유일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무슨 색깔 같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빨간색”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파흐드가 한국에 온 직후 심리 상담을 맡았던 대전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가 시리아에서 참수 장면을 목격했다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시리아 내전을 온몸으로 겪어낸 소녀 마르와 양(11)과 남동생 파흐드(10) 유세프 군(7) 삼남매를 어린이날(5일)을 앞두고 2일 대전의 자택에서 만났다. 아이들은 어린이날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런 날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래 한국인 아이들에게 ‘평화’는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이 삼남매에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특별했다.

○ 빈집 근처, 첫 둥지

‘파흐드네 집’.

2일 대전의 한 주택 담벼락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선명하고 또박또박한 글씨체였다. 가족의 둘째 파흐드가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1년이 지나서야 적었다. 모국 시리아에선 전쟁을 피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던 파흐드가 마침내 ‘자필 문패’를 단 것이다. 파흐드는 “우리 집이 말이죠, 좀 넓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제일 좋다”고도 했다. 집에는 국경일도 아닌데 깨끗한 태극기가 걸려 있았다. 막내 유세프가 길가에서 주워온 태극기다. 가끔 친구들에게서 ‘넌 나라가 없는 애야’란 말을 들어서였을까. 유세프는 아빠에게 태극기를 꼭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3년 전 삼남매 가족은 대전에 있는 이 마을에 첫 둥지를 틀었다. 아빠는 시리아 내전 이전부터 시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한국 폐차를 시리아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한국에 출장을 왔던 2011년의 어느 날 시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아빠는 한국에 발이 묶였다. 전쟁이 부른 생이별이었다. 아빠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인천행 항공권을 시리아의 가족에게 보냈다. 유세프는 “한 번도 못 봤던 아빠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전쟁에 관한 기억이 별로 없는 유세프는 누나나 형보다 더 잘 웃고 더 잘 먹었다. 덩치는 세 살 위인 형보다 더 컸다.

10평이 조금 넘는 파흐드네 집은 매달 월세와 관리비 약 30만 원을 낸다. 집 안에는 식탁과 의자 외엔 별다른 가구가 없다. 방구석의 긴 의자에 옷들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집 안에서 가장 화려한 물건은 거실 벽에 걸린 삼남매의 얼굴 그림. 엄마가 알록달록 밝은 색으로 손수 그려 가족사진 대신 걸었다.

○ ‘전쟁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

피란 온 아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최근 종전선언과 평화를 논의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봤다. ‘시리아가 한국처럼 휴전을 하면 어떨까’란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휴전만 한 상태에선 ‘전쟁을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시리아에선 ‘전쟁 안 한다’는 말이 나온 바로 다음 날에도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고 답했다.

마르와는 고국의 친척들이 다칠까 봐 걱정돼 종전을 기대하면서도 전쟁이 끝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시리아 난민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임시비자(G1 비자)를 받아 전쟁 중에는 한국에 머물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마르와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마르와는 “시리아에선 혼날까 봐 꿈을 갖지 못했는데 한국에서 아랍어-한국어 동시통역사란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마르와는 한국어를 배운 지 약 3년 만에 대전지역 다문화 학생 한국어 대회에서 은상을 타기도 했다.

가끔 고국의 할머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조혼 풍습에 따라 벌써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마르와는 “나는 꿈이 있는데 왜 일찍 결혼을 해야 하냐”라고 말한다.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씩씩하고 밝게 컸지만 이웃들에게서 들은 아이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한국에 들어와 언어 장벽과 부족한 서류 탓에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은 초기에 방황했다. 요즘도 마르와는 자주 가위에 눌린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어한다. 파흐드는 한국 정착 초기에 정서적인 변화가 심했다. 지역 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들은 적어도 2년간 꾸준히 심리상담을 해야 하는 상태인데, 상담비용을 지원받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시리아인은 지난해 말까지 1326명. 이 중 4명만 공식 난민으로 인정받아 혜택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공식 난민 지위를 주지 않고 임시비자만 발급하는 시리아인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초기 정착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난민 지원 기관 피난처의 오은정 간사는 “정부가 마르와 가족처럼 임시비자로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 아이들에게 건강보험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대전=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