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남북 화해기류속 ‘최전선’ 교동도 르포
3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 해안 철조망에서 바라본 황해남도 연안군 호동면. 3, 4km 떨어져 있는 호동면은 6·25 전쟁 후 바다가 휴전선이 되기 전까지는 38선 이남 경기도에 속해 교동면 주민이 마음대로 오가던 곳이었다. 교동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3일 오전 찾아간 인천 강화군 교동면 대룡시장. 두 사람이 같이 지나가기 빠듯한 좁은 시장 골목 사거리의 단층 건물 벽 목판 위에 새겨진 시 한 편이 6·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는 대룡시장과 교동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강화도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2014년 7월 개통된 교동대교를 넘어서면 나타나는 교동도(喬桐島). 교동도의 인사리 북진나루에서 북한 황해남도 호동면까지는 불과 2.6km 떨어져 있다.
실향민 2세로 교동도에 살면서 ‘교동 평화의 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김영애 ‘우리누리 평화운동’ 공동 대표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대표했던 교동도가 분단의 상징에서 화해와 교류 협력의 관문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맞고 있다”며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 ‘남북 대치의 최전선’인 교동도
교동도에 외부인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동대교를 지나기 전 두 차례 군 검문소를 거치고 허가증도 받아야 한다. 섬 둘레 약 37km 중 남쪽 해안 일부를 제외한 3분의 2는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인사리 군부대에는 휴전 이후 대형 확성기가 설치됐다. 2015년 8월 경기 연천에 북한이 포탄 1발을 발사한 뒤 이동식 차량 확성기와 서한리에 고정식 확성기가 추가됐다. 인사리 인현경로당에서 만난 박경임 할머니(70)는 “경로당 인근 군부대와 북한 확성기가 동시에 방송을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소음이 심했다”며 “정상회담 며칠 전(4월 24일 0시) 양측에서 거짓말처럼 뚝 그쳐 이제는 살 것 같다”고 말했다. 고정식 확성기는 1일 두 곳 모두 철거됐다.
섬 곳곳에는 방공 대피소가 설치되어 있다. 대룡시장 내 ‘교동다방’ 주인 전남수 씨(60)는 “2015년 연천 포격 이후 북한의 도발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루 한두 시간도 자지 못한다. 김포의 큰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 잊혀진 꿈 다시 살아날 기대 부풀어
섬 중심 면사무소 근처 로얄공인중개사무소 사무실 벽에는 ‘강화군 종합발전계획도’가 걸려 있다. 역시 노무현 정부가 작성한 교동도 주변 개발계획이다. 여기에는 인천국제공항에서 강화도를 거쳐 개성공단까지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있고, 한강 하구에 위치해 썰물 때마다 드러나는 모래사장인 ‘나들섬’을 남북 협력 교류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여의도처럼 개발하는 계획도 담겨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잊혀졌던 이 계획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에 현지 주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로얄중개사무소 이상욱 대표는 “최근 3, 4년간 전답은 한 평(3.3㎡)에 7만 원, 택지는 30만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최근 하루 2, 3명씩 외지인들이 찾아와 가격 동향을 묻고 있다”고 전했다. 개발 기대감에 외지인들의 투자 문의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 철조망부터 철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섬 둘레에 철조망이 쳐진 것은 북한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넘어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임진강 상류에서 떠내려 온 목함 지뢰가 터지는 사고가 이따금씩 발생하자 아예 해안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2013년엔 북한 주민 1명이 귀순한 적도 있다. 한석현 교동면장은 “철조망은 주민들의 생업에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관광객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또 외부인이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 섬에 들어올 때 두 차례 군의 검문검색을 받도록 한 조치 등도 폐지해줄 것을 촉구했다.
○ 과거와 현재,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
인천 강화군 교동도의 대룡시장 골목에 있는 ‘교동이발관’. 이곳에서 60여 년 운영되고 있는 이발관의 간판 글씨도 예스럽다. 교동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금은 휴전선이 중간을 가로질러 양측 모두 접근하지 못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국제무역항으로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드나들던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 입구다. 벽란도에 출입하려는 무역상들이 출입증을 받아야했던 남산포가 교동도의 남쪽 해안에 있다. 현재는 교동도가 남북 대치 상황으로 인적을 보기 어려운 후미진 곳이지만 남북 관계가 좋아진다면 남북을 잇는 해상요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룡시장에는 남과 북의 과거와 현재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남아 있다. 단층 가게가 좁고 굽은 골목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이발관 다방 과자집 등의 간판 글씨도 예스럽다. ‘교동다방’도 60년째 같은 자리에서 주인만 바뀌며 이어지고 있다. 1950, 60년대의 시골 읍내 모습 그대로다.
6·25전쟁 때 연백군에서 잠시 피란 온 주민들이 휴전 이후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하나둘 모여들어 대룡시장을 만들었다. 피란민 1세대인 교동이발관 주인 지광식 씨(80)는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12세에 내려와 17세 때부터 63년째 현재의 장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룡시장에서 피란민 1세대가 운영하는 가게는 지 씨 말고는 없다. 지 씨는 “초기에는 손님이 너무 많은데 밤에는 전기가 안 들어와 촛불로 비춰가며 머리를 깎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강화군청은 옛 풍경을 담은 벽화 그리기 등으로 옛 모습 보존을 지원하고 있다. 인사리 인현경로당에서 만난 서옥순 씨(80)는 “엄마가 교동도로 시집와 전쟁 전에는 세 번이나 나룻배를 타고 바다 건너 연백의 외가나 친척집을 갔지만 강화도는 가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교동도에는 연백군과 같은 생활권으로 묶여 있었던 탓인지 사투리 음식 문화 등에서 비슷한 것이 많다. 교동 주민들은 이미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가듯 옛 연백군을 방문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교동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