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 종합편성채널 JTBC ‘뉴스룸’의 ‘긴급토론-가상통화,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에서 유시민 작가가 한 말이다. 이날 토론에서 유 작가는 암호화폐로 불리는 가상통화가 실제 화폐를 대체할 수 없고, 금방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가 토론에서 주로 언급했던 암호화폐는 비트코인이다. 암호화폐 1세대 격인 비트코인은 당시 느린 거래 속도와 높은 거래수수료로 화폐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비트코인으로는 어렵다. 하지만 추후 다른 암호화폐는 가능할 수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날 토론을 지켜본 사람들의 뇌리에는 ‘비트코인으로는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것만 남았다.
당시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치솟던 비트코인으로는 거래가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실생활에 활용할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하지만 최근 암호화폐로 대표되는 블록체인 업계는 조금씩 현실에 발을 붙이는 중이다. 특유의 보안성을 활용하거나 새로운 플랫폼 사업 구축, 보상체계 마련 등 다양한 방법으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실생활에 침투하고 있는 것.
베이징대 성추행 사건 이더리움에 기록유 작가가 지적한 대로 현 암호화폐로는 실물 거래가 어렵다. 비트코인, 비트코인 캐시, 라이트코인 등 화폐 기능만 갖고 있는 암호화폐는 거래 속도가 너무 느려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상 탄생부터 현재까지 채굴된 코인의 거래 내용을 모두 작성해야 하기 때문.
하지만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다. 4월 23일 익명의 이더리움 블록체인 주소로 자신에게 ‘0개’의 이더리움을 보낸 거래 코드 한 줄이 발견됐다. 이상한 이 코드는 사실 거래 내용보다 그 밑에 적힌 내용이 중요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 익스플로러인 이더스캔(etherscan.io)에서 해당 거래 내용을 검색하면 지금도 쉽게 코드를 찾을 수 있다. 검색하면 창에 암호화된 코드가 보이고 그 아래 ‘Convert to UT8’ 버튼이 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코드가 영어와 중국어로 된 문서로 변한다. 두 문서는 같은 내용으로 중국 베이징대 교수 성폭행 사건에 관한 것이다. 작성자는 문서에서 자신을 베이징대에 다니는 ‘웨신(岳昕)’이라고 밝히며 ‘7명의 학생과 성폭행 사건에 관한 정보공개청구서를 대학에 제출했으나 학교 측에서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과 함께 ‘네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부모님이 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걸 아느냐’는 등의 압박만 돌아왔다’고 밝혔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올라온 중국 베이징대 교수 성폭행 사건과 관련된 문서.
문서에 언급된 내용은 1996년 베이징대에 재직 중이던 선양(沈) 교수가 제자를 성폭행한 사건이다. 피해자의 자살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졸업 후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이 사실을 최근 인터넷에 올리며 알려지게 됐다. 선 교수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98년 베이징대가 이 사건을 이유로 그를 면직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문서는 또 ‘베이징대 측은 선 교수의 사임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웨이보, 위챗, 베이징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관련 내용이 올라오면 빠르게 삭제되고 있다’고 밝혔다.
블록체인망에 담긴 기록은 과반수 사용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당국이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계속 지우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자 수정과 삭제가 어려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올린 것이다.
블록체인이 각광받게 된 것은 보안 때문이다. 분산 원장 시스템인 만큼 해당 블록체인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전부 조작해야 해킹이 가능하다. 간혹 암호화폐가 해킹당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하지만 블록체인이 아닌 암호화폐가 보관된 전자지갑이 해킹된 사건이다. 아직 블록체인 내부에 저장된 정보가 해킹된 사례는 없다. 지난해 4월 암호화폐거래소 야피존과 12월 유빗 해킹 사건도 모두 암호화폐가 보관된 전자지갑이 해킹에 노출된 사례였다.
보안성은 현존 최고높은 보안성에 블록 간 공유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니 가장 먼저 이 기술에 눈독 들인 업계는 금융권이다. 금융투자협회는 지난해 10월 26개 증권사 간 ‘금융투자업권 블록체인 공동인증 서비스’(공동인증 서비스) 상용화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온라인 주식거래나 자금이체를 할 때 금융기관마다 다른 인증서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공동인증 서비스를 통해 인증서 하나로 여러 기관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은행권도 공인인증서를 블록체인에 업로드하려 나서고 있다. 김태영 은행연합회장은 2월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KB국민, 신한, KEB하나, 우리, NH농협 등 18개 은행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통해 은행권 블록체인 공동인증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4월 시범적용 후 7월에는 상용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상용화가 이뤄지면 더는 은행별 공인인증서를 만들 필요가 없다. 금융 소비자는 모바일 공인인증서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고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등록된 인증서를 한 번만 발급받으면 18개 은행에서 이를 사용할 수 있다. 비밀번호도 문자와 숫자, 특수부호를 조합해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지문 등 생체인식 수단이나 패턴 등으로 다양하고 간편해진다.
독일 스타트업 ‘Slock.it’은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계약 플랫폼 업체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계약을 활용하면 회사나 금융기관 없이 개인 간 거래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차를 판매할 때 기존에는 대부분 중개업체를 거쳐야 했다. 중개수수료를 내면서도 업체를 거치는 이유는 판매자가 품질이 낮은 상품을 높은 가격에 속여 판매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고거래는 따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드물어 피해를 입었을 때 판매자를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계약서를 올려두는 절차가 생기면 질 낮은 상품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을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암호화폐를 둘러싼 불신론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다르다’는 것이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능을 이용한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암호화폐 거래를 통제해도 블록체인 산업만 성장시키면 충분히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 같은 주장에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암호화폐라는 보상체계가 있어야 블록체인의 성장이 빨라지기 때문. 2세대 암호화폐의 대표 격인 이더리움이 등장하며 블록체인은 안드로이드나 윈도 같은 일종의 운영체제가 되고 있다. 이더리움이 개발한 dApp은 ‘Decentralized Application’의 약어로 블록체인이라는 탈중앙화 분산 원장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앱을 말한다. 현재는 퀀텀(Qtum), 이오스(AOS) 등 다양한 암호화폐가 dApp을 지원한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올라온 중국 베이징대 교수 성폭행 사건과 관련된 문서.
암호화폐 있어야 블록체인 성장한다한 가지 사례로 블록체인 기반 커뮤니티 ‘스팀잇’이 있다. 블로그 형식으로 글이나 그림, 사진 등 콘텐츠를 올리면 STEEM(스팀)이라는 암호화폐로 보상 받을 수 있다. 콘텐츠에 따라 이용자가 업보팅(좋아요)을 하는데 이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 업보팅을 많이 받은 콘텐츠는 ‘인기글’ ‘대세글’란에 소개된다. 이용자도 자신이 업보팅한 콘텐츠가 반응이 좋으면 그에 따른 큐레이션 보상을 받는다. 이 때문에 보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암호화폐로 보상 받는다는 것 외에 다른 블로그 서비스와 스팀잇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성한 내용을 쉽게 고치거나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콘텐츠 하나를 올리더라도 사실관계 등을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콘텐츠를 만들기 어려운 만큼 이용자의 신뢰도는 높아진다. 최근 스팀잇에 ‘먹스팀’(muksteem.com)이라는 전국 맛집 지도가 생겼다. 스팀잇에 올라온 맛집을 모아 구글 지도에 표시하는 방식이다.
국내 헬스케어 스타트업 ‘휴먼스케이프’는 환자 간 의료정보 공유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 기존 의료정보 공유 커뮤니티는 글을 쓰는 사람은 계속 쓰고, 읽는 사람은 계속 읽기만 해 홍보성 정보가 난립한다는 등 문제점이 있었다. 휴먼스케이프는 글 작성자에게 암호화폐 등 보상체계를 구축해 정보 공유를 활성화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를 위한 초기 자본금 마련에도 암호화폐가 있는 편이 유리하다.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자본금을 모으기 어려워 일종의 크라우드펀딩인 암호화폐공개(ICO)를 진행해 투자자를 모은다. 이때 암호화폐가 주식이나 지분처럼 보상을 약속하는 증서 구실을 한다. ICO가 성공해 프로젝트가 알려지고 암호화폐가 거래소에 상장되면 투자자들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3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