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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현장칼럼/송평인]‘중국식 사회주의’의 유령이 트리어에 어른거린다

입력 | 2018-05-07 03:00:00

마르크스 출생 200주년, 고향 트리어를 가다





《 카를 마르크스는 200년 전인 1818년 5월 5일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5일 트리어에서 가장 주목을 끈 행사는 중국이 기증한 5.5m짜리 거대한 마르크스 전신 동상의 제막식이었다. 동상은 트리어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고대 로마 유적 포르타 니그라 인근에 세워졌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곳이지만 그동안 마르크스 동상 하나 없었다는 것이나 이제야 세워지는 마르크스 동상이 중국 조각가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
 

송평인 논설위원

트리어는 우연찮게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됐다. 이 관계는 2000년 이후 중국인 관광객들이 유럽을 찾기 시작하면서 생겼다. 오늘날 트리어에는 매년 이곳 인구 10만 명보다 50%나 많은 15만 명가량의 중국인 관광객이 찾는다. 트리어는 유럽 대륙의 관문인 프랑스 파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모두 멀다. 모젤강가의 가파른 언덕은 에곤 뮐러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같은 고급 와인을 만들지만 고속열차의 접근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런 곳이 중국인 유럽 단체관광의 필수 코스처럼 돼 있다.

마르크스 생가는 지난해 한국 촛불시위대에 인권상을 준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오래전에 사들여 마르크스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마르크스 생가를 방문한 중국인들은 대개 입장료가 드는 기념관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떠났다. 중국 정부의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때 중국인 한국 단체관광이 싹 끊긴 데서 알 수 있듯이 단체관광에는 중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다. 중국인의 유럽 단체관광은 트리어를 끼워넣어야 허가가 잘 난다고 한다. 그런 반(半)강제적 관광이니 굳이 기념관까지 들어가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트리어 시내의 갤러리 ‘카센바흐’의 주인 이름은 카를로스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집안과 관련이 있느냐고 하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트리어에는 마르크스란 성을 가진 사람이 꽤 있다. 그는 “트리어 주민들은 중국인 관광객을 반길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국과 트리어가 자꾸 연결되는 데다 현실적으로는 중국인 관광객이 트리어에 1시간 정도 머물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관광수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다.

마르크스는 겨우 30세이던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썼다. 베를린에 있는 독일역사박물관에는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독일어로 발행한 ‘공산당 선언’ 초판이 전시돼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Ein Gespenst geht um in Europa)’로 시작하는 첫 장이 펼쳐져 있다. 그 책의 마지막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는 구호로 끝난다.

독일어에 포어매르츠(Vorm¨arz·3월 전)라는 말이 있다. 1848년 3월 혁명에 이르는 전까지의 정치적 요동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프러시아 정부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세력을 탄압하고 그에 반발해 독일의 중북부 도시에서 입헌체제 수립 운동이 벌어지던 때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트리어와 그가 공부한 본은 모두 베를린의 프러시아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시대의 정치적 풍운아가 태어나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는지 모른다.

독일 트리어 한 서점의 전시대에 마르크스 두상에 꽂힌 중국 화폐가 오늘날 마르크스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트리어=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정치적 팸플릿을 먼저 내고 그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자본론’을 런던에서 쓰다가 죽었다. 오늘날 경제학자 중에 자본론을 진지하게 연구할 경제학 책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자본론을 나 같은 386세대는 소련이 멸망하고 난 후에까지 제대로 읽어보겠다고 머리를 싸매던 시절이 있었다.

함부르크에서 마르크스 200주년을 앞두고 3일간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심이 되는 발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계승해 비판이론을 펼친 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의 좌장인 악셀 호네트가 한 강연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다이내믹: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함과 한계’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마르크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를 이해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다이내믹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20세기 후반 독일 엘베강 동쪽의 유라시아 대륙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동유럽의 소련 위성국가들로부터 러시아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과 북조선까지 유라시아 대륙 끝단의 한반도 남쪽을 제외하고는 공산주의가 휩쓸었다. 그 공산주의는 1990년 소련의 붕괴로 몰락했다.

유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 유령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을 배회하고 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유령이다. 중국 정부가 4일 마르크스 출생 2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다. 독일의 중국학자 제바스티안 하일만은 시진핑의 사회주의를 ‘디지털 레닌주의’라고 명명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획경제는 실패했으나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의 도움을 받는 중국의 계획경제는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적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중국이 민주화의 기대에서 멀어져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회귀한 것도 이런 망상에 기인한다. 그 망상 속에 북한이 들어있고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형이다.

▼ “마르크스는 서구적 사상가, 중국과는 거리 멀다” ▼

트리어대에서 23∼25일 열릴 마르크스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준비를 총괄하는 크리스티안 얀센 역사학 교수(사진)를 만났다.

―트리어 주민은 트리어가 마르크스의 출생지임을 자랑스러워하는가.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관광객이 마르크스의 출생지라는 점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사고가 러시아와 중국, 북한에 영향을 줬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도 갖고 있다. 내 의견으로는 이미 1883년에 죽은 사람에게 20세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이 마르크스 저작의 일부를 성서처럼 여긴 것이 문제다. 마르크스의 글은 리버럴한 것도 있고 폭력적인 것도 있다. 그는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용구는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다.”

―왜 독일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트리어에서 19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는 서구적 사상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쪽 프러시아를 싫어했다. 그는 트리어, 본, 파리, 브뤼셀, 런던에서 살았고 베를린에서는 아주 잠깐 공부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큰 오해가 하나 있다. 마르크스를 러시아 중국 등 동방과 관련짓는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그리스 철학, 유대교와 가톨릭의 서구적 전통 속에 있었다. 트리어는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15년 프러시아에 귀속됐다.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 1848년 혁명이 일어나 유럽으로 번져갈 때 트리어에서도 강력한 반프러시아적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시즘은 총체성(Totalit¨at)을 추구했다. 베버는 총체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베버에게는 경제학이 없다. 역사와 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철학자들은 칸트와 헤겔처럼 총체적 이론 체계를 추구해 왔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론 체계를 세우고자 추구한 마지막 학자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확고한 체계를 세우기에 현실은 너무 복잡하다. 다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가 그것을 말한 19세기에는 아무도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지 않았다.”

―많은 중국인이 트리어를 찾는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국민은 중국인이 유일한 듯하다.

“중국 체제는 유교와 마르크스주의의 혼합체다. 중국인은 자신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교는 마르크스가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는 한번도 공산주의 혁명이 러시아와 중국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에 위배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