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벽과 노비 등이 한 팀을 이루어 과거시 험장에 있는 모습.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貢院春曉圖)’. 미국 패트릭 패터슨 씨 소장.
‘전통시대에 국가를 운영하는 최고의 관리를 시험으로 뽑았다’는 사실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하겠지만, 고위공직자를 시험이라는 객관적 평가기준으로 선발했던 나라는 중국, 한국, 베트남뿐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박제가의 ‘북학의’, 한양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 등에 따르면 과거시험장은 난장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장 주변에는 공정성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많은 용어들이 난무하였다. 과장에 들어갈 때 예상 답지나 참고 서적을 갖고 가는 책행담(冊行擔), 작성된 답지를 대신 필사해 주는 서수(書手), 몸싸움을 통해 과거시험장에 좋은 자리를 잡아 주는 선접군(先接軍), 과거시험장에서 상부상조하기로 한 팀의 의미를 갖는 접(接) 등이 버젓이 활동했다.
가장 심각하고 충격적인 존재는 거벽(巨擘)이다. 과거시험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일종의 대리시험 전문가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서울의 고봉환, 송도의 이환룡, 호남의 이행휘, 호서의 노긍 등이 당시의 유명한 거벽이었다. 특히 영남의 대표적인 거벽 유광억은 이옥이 지은 ‘유광억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광억은 부잣집 아들의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여 합격시킨 후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명성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높아갔다.
한번은 영남지역의 과거시험에 서울에서 파견된 시험관이 답안지를 채점하게 되었다. 시험관은 영남의 인재로 유광억이라는 사람을 추천받았고, 과거시험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고 싶었다. 당시 과거시험에는 답안지에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감식안을 발휘하여 그가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답지를 1등으로 뽑았고, 이어서 2, 3등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뽑고 보니 1, 2, 3등 모두 유광억의 답안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에 의혹을 품고 조사한 결과 1, 2, 3등 답안지 모두 유광억이 대리로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시험관은 유광억을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유광억은 스스로를 과적(科賊)으로 칭할 만큼 자신의 부정행위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였다. 그는 서울로 압송될 경우 어차피 고문을 받다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살을 선택했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지만 부정행위 말고는 달리 그 재주를 발휘할 곳이 없었던 불행한 문인의 최후였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