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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획시리즈]38년전 ‘민족민주화성회’ 이끌며 희생정신 보여줘

입력 | 2018-05-14 03:00:00

‘광주의 아들’ 박관현 열사 <1>




박관현 열사가 19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유세를 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관현장학재단 제공


《 1980년 5월 14일부터 사흘간 광주 옛 전남도청에서 10만여 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임시로 마련된 연단은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연단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주의 수호’를 목 놓아 외쳤다.

집회는 한 청년의 민주화 염원을 담은 연설로 마무리됐다. 청년은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시위를 했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오전 10시 각 대학 정문에 집결한 뒤 낮 12시 도청에 모여 투쟁하자”고 외쳤다. 시민들은 “청년이 김대중 선생보다 연설을 더 잘한다. 똑똑하다”며 박수를 보냈다. 이날 집회는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족민주화성회’였다. 마무리 연설의 주인공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당시 27세)다.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박 열사는 5월 17일 예비검속을 피해 피신했다가 2년여 만에 붙잡혔다.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숨을 거뒀다. 그를 두고 5·18을 함께하지 못한 부채의식을 죽음으로 갚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38년 전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며 민주·정의·희생의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박 열사의 삶을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
 

박관현 열사가 대학에서 법학개론을 수강하며 사용했던 노트 표지.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 열사는 광주로 유학을 와 수창초등학교, 광주동중, 광주고를 졸업했다.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3수 후 군을 제대해 대학에 들어간 터라 신입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도시락 두 개를 챙겨 밤늦도록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했다. 늦깎이 법대생이지만 양심적인 법조인이 돼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었다. 그는 캠퍼스에서 중고교 동창인 양강섭 씨(2016년 별세)를 우연히 만났다. 양 씨는 당시 영문과 1학년이었다. 독문과 1학년이던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용화 씨(65)와도 친구가 됐다.

세 사람은 학생운동의 사회운동 참여 여부를 안주 삼아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박 열사는 검정 고무신에 염색한 검은색 군복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소탈했다. 술에 취하면 노래 ‘방랑 김삿갓’을 잘 불러 ‘박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박 열사는 두 친구에게 “학생운동을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정 씨는 “박 열사는 모두가 좋아할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 학생운동을 하면 리더가 될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박 열사는 공부와 학생운동을 놓고 고뇌했다. 고교 3학년 때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설명을 하는 교사에게 ‘진실을 알려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였다. 고교 시절 일기장에 암울한 현실을 적을 정도로 시대 상황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박 열사가 민주화운동에 눈뜬 것은 1978년 6월이다. 송기숙, 명노근 씨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란 성명을 통해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6·27 교육지표 사건이 터졌다. 그는 두 친구가 교수 연행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하다 감옥에 가고 무기정학을 당하자 낙담했다. 이후 고교 동창인 장석웅 씨(64), 후배 신영일 씨(1988년 별세)의 권유로 1978년 12월 광천동 광주공단 실태조사에 참여한다.

실태조사팀은 노동운동을 가르치던 들불야학 교실을 함께 썼다. 박 열사는 이때 학생운동 선배인 고 윤상원 열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60여 일간 진행된 실태조사 결과는 전남대 학보에 실려 반향이 컸다. 박 열사는 이런 인연으로 1979년 4월 들불야학 강학생활을 시작했다. 강학을 같이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인 전용호 씨(60)는 “박 열사는 추운 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혼자 실태조사 자료를 검토하고 함께 식사할 때도 먼저 설거지를 할 정도로 솔선수범한 듬직한 형이었다”고 말했다.

들불야학이 사정당국에 노출되면서 탄압이 뒤따랐다. 당시 정국은 유신정권 말기여서 학생운동에 대해 혹독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면서 등장한 신군부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권력을 잡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갔다. 전남대 학생운동권은 전국 대학과 연대하며 교내 민주화를 이끌 총학생회 부활을 논의했다. 박 열사는 학생운동권의 압도적인 지지로 1980년 4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1980년 봄 대학 총학생회가 6년 만에 부활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광주에도 그 싹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