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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사회] 손녀 뻘 과외 선생님 “할머니들의 열정, 많이 배웠어요”

입력 | 2018-05-14 17:16:00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12일 토요일 오전,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자중학교 지하1층 다목적실 스승의날 맞이 일성여중-서울여중 멘토링 현장르포.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어휴, 이걸 어떻게 읽었더라.”

만학도 김송자 할머니(77)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영어 교재에 적힌 단어 ‘First’의 발음을 떠올리려 한참을 우물거렸지만 끝내 기억이 나지 않은 듯 했다. 옆에서 김 할머니를 지켜보던 ‘과외 선생님’이 영어 단어 옆에 한글로 ‘퍼스트’라고 썼다. 어두웠던 김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과외 선생님인 신미성 양(15·서울여중 3학년)도 따라 웃었다.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12일 토요일 오전,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자중학교 지하1층 다목적실 스승의날 맞이 일성여중-서울여중 멘토링 현장르포.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12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교 다목적실, 김 할머니처럼 일성여중 1학년 학생 20명의 일대일 과외 수업이 한창이었다. 일성여중은 만학도를 위한 학교다. 총 6년이 걸리는 중·고교 과정을 각각 2년씩 총 4년에 마칠 수 있다. 학생 평균 연령은 61세, 대다수는 전쟁, 가난, 여자 등의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60~80대 할머니들이다. 이날 과외 수업은 앳된 ‘선생님’들이 맡았다. 2015년부터 격주 토요일마다 일성여중을 찾아 할머니 학생들의 공부를 돕고 있는 서울여중 2, 3학년 학생들이다.

“선생님.” 할머니들은 손녀 뻘 서울여중 학생들을 이렇게 불렀다. 머리가 하얗게 샌 김수희 할머니(78)는 “손녀 같아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지. 이렇게 쉽게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어딨냐”며 자신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는 김주현 양을 추켜세웠다. 김희자 할머니(69)도 “학교 선생님은 진도를 빼느라 오랫동안 설명해주지 못하는데 서울여중 선생님들은 와서 자세히 설명해줘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12일 토요일 오전,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자중학교 지하1층 다목적실 스승의날 맞이 일성여중-서울여중 멘토링 현장르포.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날 과외 수업 시간은 총 2시간. 할머니들과 서울여중 학생들 중 누구도 쉬지 않고 2시간을 꼬박 채웠다. 서울여중 학생들은 행여 수업에 방해될까 휴대전화를 아예 꺼뒀다. 할머니들은 학생들이 더없이 고맙다. 김송자 할머니(77)는 “가르쳐달라고 하면 도망가는 손녀들보다 훨씬 낫다”며 “가끔 내가 잘못 알아들어서 (선생님이) 갑갑한 건 아닌지…”라며 걱정했다.

하지만 서울여중 학생들도 할머니들에게 많이 배운다. 김주현 양은 “할머니들이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교사가 장래희망인 신미성 양은 “보람이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봉사활동인데 할머니들의 열정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12일 토요일 오전,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자중학교 지하1층 다목적실 스승의날 맞이 일성여중-서울여중 멘토링 현장르포.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12일 토요일 오전,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성여자중학교 지하1층 다목적실 스승의날 맞이 일성여중-서울여중 멘토링 현장르포. 만학도 할머니들의 선생님 된 서울여중 학생들.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일일 선생님 경험을 한 서울여중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을 떠올렸다. 정재윤 양은 “할머니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 교사가 꿈인 하재은 양 역시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게 예의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손녀로 돌아갔다. 변갑연 할머니(78)는 작은 손가방에서 꺼낸 초콜릿 한 움큼을 송미주 양 손에 쥐어주었다. 최고령인 진경순 할머니(83)는 자신의 공부를 도와준 하재은 양의 손을 쓰다듬었다. 김희자 할머니가 교실 문을 나서던 한 학생의 입에 떡을 넣어줬다. “비 오는 데 조심히 가.” 할머니들은 현관까지 나와 서울여중 학생을 배웅했다.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