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00년 필라델피아의 지하전선 이용과 야구계의 토마스 에디슨
비밀을 공유한 팀끼리는 신사협정으로 사인 훔치기 중지
네가 하면 나도 한다. 그라운드 밖에서 벌어지는 첩보전의 세계
쌍안경, 광고판, 신문지 등 사인을 훔치고 전달할 방법은 많다
1900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베이커 볼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신시내티 레즈의 더블헤더 제1경기 3회. 경기장을 찾은 4771명의 관중들은 야구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광경을 지켜봤다. 주인공은 신시내티의 주장이자 유격수 토미 코코란. 경기도중 갑자기 3루 코치석 쪽으로 달려간 코코란은 스파이크로 땅을 팠다. 손까지 동원해서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파헤치는 그를 주심 팀 허스트와 두 팀의 선수들, 그라운드 관리인, 경기장을 지키던 경찰까지 빙 둘러서서 지켜봤다. 코코란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 눈썰미 좋은 선수가 찾아낸 기상천외한 사인 훔치기 현장
경기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라운드 여기저기 의심나는 곳을 살펴봤다. 그러던 차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3루 코치석의 피어스 피티 칠레스의 움직임이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발 한쪽을 정확히 한 곳에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코코란은 확신했다. 마침내 땅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전선에 연결된 나무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전기 신호등이 들어 있었다. 기상천외한 필라델피아의 사인 훔치기 수법이 마침내 온 세상에 드러났다.
신시내티를 비롯한 리그의 다른 팀들은 그동안 필라델피아 원정 때마다 홈팀이 사인을 훔친다는 의심을 해왔다. 사건을 조사해온 조 디트마르는 “필리스가 홈에서 36승20패로 최고성적이지만 원정에서는 24승35패로 5위다. 이전 시즌부터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오늘 이 사건 이 나오기 전까지 그 것이 무엇인지 추측을 만족시켜줄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필리스는 꿀단지에 몰래 손을 집어넣다가 딱 걸린 꼴”이라고 했다.
● 야구계의 토마스 에디슨, 모건 머피의 등장
다음날 신문은 2명의 관련자 얼굴을 내보냈다. 그동안 배후에 가려져 있던 사인 훔치기의 주역은 모건 머피였다. 팀의 3번째 물방망이 포수였다. 1899시즌부터 그의 임무는 그라운드 밖에 있었다. 외야의 클럽하우스가 근무처였다. 그 곳에서 빈틈을 통해 쌍안경으로 상대팀 포수의 사인을 훔쳤다. 머피는 훔친 사인을 모스 신호를 이용해 3루 코치에게 전달했다. 신호 하나는 빠른 공, 두 개는 커브, 세 개는 체인지업 이었다. 3루 코치 칠레스는 땅속의 전선을 타고 전달되는 신호를 발로 받아서 타석의 타자들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필리스는 사건 다음날 경기 때 반격했다. 3루코치 칠레스가 여전히 그 곳에서 발을 이용해 사인을 받는 듯한 동작을 했다. 신시내티는 분개하며 또 땅을 팠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상자에 있던 신호기의 전선은 끊겨져 있었다. 이미 경기를 앞두고 전선을 치워버린 뒤 상대의 약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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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츠버그의 사인 훔치기와 그들만의 신사협정
9월 26일 필리스가 브루클린으로 원정을 떠났다. 머피는 이번에도 경기장 밖의 공동주택 유리창을 통해 사인을 훔쳤다. 쌍안경으로 브루클린 포수의 사인을 알아낸 뒤 접은 신문지를 이용해 타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9월 29일 신시내티가 피츠버그에서 원정경기를 벌일 때였다. 이번에도 토미 코코란이 행동에 나섰다. 외야석 밖의 조그만 헛간을 지목했다. 동료와 함께 뛰어가자 헛간 속에서 리틀 필 가이어라는 이름의 사람이 허둥지둥 나왔다. 손에 쌍안경을 들고 한 손에는 L자 모양의 쇠 작대기를 들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는 서로가 사인 훔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1900년 필라델피아의 더프 쿨리가 피츠버그로 트레이드되면서 두 팀의 사인 훔치기 방법은 서로에게 공유됐다. 어쩔 수 없이 두 팀은 자기들만의 신사협정을 맺었다. 맞대결 때는 서로가 뻔히 아는 사인 훔치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모건 머피는 신뢰의 상징으로 두 팀의 맞대결 때는 덕아웃에서 경기 내내 노닥거리고 놀았다.
● 신뢰상실의 시대 네가 훔치면 우리도 훔친다
사인 훔치기 사실이 드러나자 그동안 당해왔던 팀들에서 난리가 났다. 징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루클린 다저스는 야구기록에서 필리스의 시즌 타격기록과 팀 성적을 영원히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팀들은 앞으로 심판이 두 팀에게 사인 훔치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에 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자고 했다.
10월 2일 이 사건과 관련한 청문회가 열렸다. 사건의 당사자인 필리스의 책임자 존 로저스 대령은 통신장비 사용을 부인했다. “7월에 카니발을 위해 경기장을 빌려줬는데 이때 경기장에 조명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사용된 전선일 뿐 사인 훔치기와는 관계가 없다.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 언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죄라고 주장해 우리를 향한 문제제기를 권위 있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면서 사건이 여기서 마무리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로저스의 청문회 일주일 뒤 ‘뉴욕 노스 아메리카’의 찰스 드라이덴 기자가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당초 쌍안경을 통해 사인을 훔치고 신문지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었지만 너무 쉽게 노출된다는 우려 때문에 칠레스가 땅속의 전선을 통하는 비밀 전송방식을 만들어냈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19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는 서로가 속고 속이는 신뢰상실의 시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음 시즌 필리스의 지역 라이벌 어슬레틱스는 클럽 관리인에게 경기장 지붕에서 쌍안경으로 상대팀의 사인을 대놓고 훔치도록 지시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사인 훔치기와 관련한 불문율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아직 6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