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양반뿐 아니라 노비나 여성도 거리낌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 옥에 갇힌 죄수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법을 몰라도, 글을 쓰지 못해도 소송은 가능했다. 법률 전문가 ‘외지부’ 덕분이었다.
조선은 귀천을 떠나 백성이 자유롭게 소장을 제출하도록 배려했다. 18세기 편찬된 목민서 ‘치군요결(治君要訣)’은 소장 제출을 어렵게 하는 아전을 처벌하도록 적고 있다. 그러나 백성에게 관아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소송을 제기하려면 법전에 근거해 소장을 한문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문에 능숙하다고 소장을 제대로 쓰는 것도 아니었다. 소장은 공문서인 만큼 서식과 내용을 구비해야 제 기능을 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법조문을 모르는 마을 훈장이 소장을 쓰면, 증거는 빼놓고 감정에 호소하는 문장만 늘어놓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외지부는 법률 지식과 문서 작성 능력을 토대로 법에 무지한 이들을 도왔다. 소장을 대신 썼고, 소송이 진행되면 자문도 맡았다. 조선시대 소송은 세 차례 진행되었고 두 차례 승소해야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또 판결에 불복하면 상급기관에 재심을 요청했다. 외지부는 긴 소송 과정에서 의뢰인을 보호했고, 법률대리인 역할도 함께했다.
명종 때 역참 소속 노비 엇동은 양반의 부당한 추노(推奴)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다. 선조 때 다물사리는 자신과 자식까지 사유재산으로 만들려던 양반 이지도에 맞서 자신은 나라에 속한 성균관 공노비라며 소송했다. 엇동과 다물사리는 글을 모를뿐더러 법률 지식도 없었다. 외지부가 있었기에, 힘없던 두 사람은 양반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지부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법률 지식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