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7화> 풍전등화
1919년 3·1운동 당시의 중앙학교 숙직실(오른쪽 건물)과 중앙학교 운동부 학생들(아래)이 사용하던 합숙소(왼쪽 건물). 교장 사택이기도 한 숙직실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최린 등이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연합을 논의했다. 중앙고교 제공
“세상에서 당신을 매국적이라고 하는데 흥국대신(興國大臣) 한번 될 생각은 없소?”(언론인 유광렬이 한국일보 1974년 3월 2일자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에서 친구이자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에게 직접 들었다고 밝힌 내용.)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소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은 이완용(1858∼1926)에게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대신이 돼 보라는 권유였다. 손병희가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수괴로 지탄받던 이완용더러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나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이완용은 거절했다. 대문을 나와 인력거에 몸을 싣는 손병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완용을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는 것은 독립운동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일본인에게 누설하면 거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오세창 권동진 등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섰던 길이었다. 평소 호방한 성품으로 유명한 손병희는 “매국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완용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온 민족이 다 독립을 원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강행했었다.
이완용은 3·1운동 발발 때까지 거사 계획을 고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완용은 3·1운동 발발 후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만세운동을 망동(妄動)이라고 비난하며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세 차례나 게재했다.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교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에서는 중앙학교가 있는 북촌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운동이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최남선이 집필하는 독립선언서는 완성 단계에 있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 및 날인하는 일만 남았다. 독립선언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일이었다.
민족 역량을 총집중하는 궐기인 만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의 명망가들을 참여시키는 게 중요했다. 자의든 타의든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기는 하나 인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독립선언서 대표자로 서명하면 천군만마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학교의 송진우와 현상윤, 선언서 작성을 담당한 최남선, 천도교의 대외 창구이자 보성학교 교장 최린 등 4명이 그 실무를 맡았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윤용구 김윤식 등을 대상 인물로 꼽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획이 어긋났다. 손병희와도 막역한 사이인 박영효를 비롯해 지목된 지도자들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난색을 표했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원로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실무자들이 망연자실해하자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직접 만나게 됐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老朽)한 인물들이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오. 신성한 제수(祭需)에는 늙은 소보다도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외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떻소.”(‘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최린은 민족대표를 원로들에게서 구할 것이 아니라 손병희를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받들고 30, 40대의 젊은 실무진이 모두 민족대표로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최남선이 “가업(家業) 관계로 직접 참가할 수는 없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최남선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주의(主義)에는 찬동하나 민족대표로 정면에 나서는 정치운동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최남선에 대한 지방법원예심신문조서·1919년 5월 19일, 이하 3·1운동 후 일제의 검경 및 재판부 신문조서는 동국대 고재석 교수의 ‘3·1獨立運動(市川正明編)’ 일본어 번역본을 인용함.)
최린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최 선생(최남선)이 운동에 적극 참가 안 해 주신다면 나도 참가할 수 없는 일이오. 또 최 선생이나 송 선생(송진우)의 말씀과 같이 민족운동은 천도교만으로는 진행시킬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이 운동을 중지합시다.”(‘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촛불이 힘없이 꺼져갔다. 최린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일은 이 자리에서 전부 취소하고 피차간에 아무 책임도 없기로 하자”며 중앙학교 숙직실을 박차고 일어났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파인 정노식을 통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국내에 들고 왔던 도쿄 유학생 송계백에게 전보(2월 6일자)를 치게 했다. 도쿄의 2월 8일 거사를 일단 중지하고, 시기를 보아 국내와 호응해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자고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경성우편국에서 타전한 전보는 차출인의 이름이 불명(不明)으로 처리돼 송계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정노식에 대한 경찰신문조서·1919년 4월 19일) 2월 8일 도쿄에서의 독립운동도 하마터면 무위로 돌아갈 뻔했다.
○ 세 종교 합작
모든 게 백지로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났다. 도쿄에서 “기미(期未)를 이팔(二八)에 판다”는 암호 전보가 날아왔다.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도쿄 유학생들이 기미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것이다.
더 이상 독립운동의 호기를 모른 체할 수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이 다시 삼각정의 최남선 집을 찾았다. 현상윤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떻겠소?”(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남선도 마냥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최남선은 현상윤의 제안에 “좋소. 그리합시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와의 연결은 최남선이 주선키로 했다.
2월 11일 북촌 김사용의 집(인촌 별택)에 검정 두루마기를 걸친 촌로 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찾아왔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이었다.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함께할 유력 인물로 지목한 기독교 측 인사였다. 실제로 이승훈은 관서(關西) 지역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이 자리를 함께했다. 최남선은 일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중앙학교 팀은 그동안의 계획과 천도교의 동향을 설명한 뒤 기독교 측의 참가를 요청했다. 이승훈은 천도교와의 합동 거사를 즉석에서 수락했다.(‘인촌 김성수전’)
이승훈은 이미 상하이와 도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2개월 전인 1918년 12월, 이승훈은 상하이의 동제사 요원 선우혁을 만나 해외 독립운동 계획을 상세히 들었고 국내에서의 지원을 요청받았다. 이승훈은 집안의 논까지 팔아 선우혁에게 운동자금을 주며 하늘에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불쌍한 백성에게 독립을 허하시렵니까, 허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시렵니까.”(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자나 깨나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이승훈의 시원시원한 말에 인촌 역시 자금 제공으로 응원했다. 이승훈과 동향이며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는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3원가량이었으므로 3000원은 쌀 1000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승훈은 그날 저녁 바로 관서 지방으로 떠났다. 이승훈의 행보는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평안남북도를 오가며 기독교 장로파의 길선주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및 감리파의 신흥식 등과 만나 민족대표자 서명을 약속받았다. 이승훈은 이들의 인장(印章)을 가지고 신흥식과 동반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그러나 이승훈의 발 빠른 행보와 달리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계는 계속 지연됐다. 천도교 측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던 최남선 등의 태도가 모호했다. 이승훈은 천도교 측에서 거사 직전에 꽁무니를 뺀다고 의심했다.
사정은 있었다. 최린과 최남선 등 실무진이 계속 국내 원로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 리 없던 이승훈은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 측의 단독 거사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최남선이 소격동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을 찾아왔다. 2월 21일 마침내 최남선의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만났다. 최린의 북촌 재동 집에서 이승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천도교 태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오? 기독교만으로 독립운동을 단독으로 결행할 것이오.”(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인 만큼 종교의 이동(異同)을 불문하고 합동하여 추진합시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린은 원래 계획대로 천도교와 기독교 합동으로 일을 추진하자고 이승훈을 달래듯 말했다. 이에 이승훈이 운동자금으로 5000원 정도가 필요하니 천도교 측에서 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병희의 재가를 받은 최린이 쾌히 승낙했다.
사흘 후인 24일 이승훈은 함태영(1873∼1964)과 함께 기독교 공식 대표 자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현 덕성여중 자리)의 손병희를 방문한 후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확정했다.
그제야 일이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최린은 만해 한용운의 계동 집을 찾아갔다. 최린과 한용운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하던 친구 사이였다. 한용운은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신도 수가 많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승려였다.(한용운 경찰신문조서 제1회·1919년 3월 1일, ‘한용운전집’) 한용운은 즉시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을 수락했고 한용운의 권유로 승려 백용성도 동참했다.
우여곡절 끝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됐다. ‘민족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운동이 한반도에서 성사된 것이다.
▼33인 순서는… 이승훈 “순서는 무슨, 이거 죽는 순서야” 교통정리▼
민족대표 명단, 천도교 손병희-기독교 장로파 길선주-기독교 감리파 이필주-불교 백용성… 나머지는 가나다順
3·1운동의 민족대표로 나서기로 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합했던 서울 정동교회. 동아일보DB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말 한마디에 참석자들은 곧 조용해졌다. 이에 따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인의 순서가 정해졌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선두로 하고 기독교 장로파 목사인 길선주, 기독교 감리파 목사인 이필주, 불교 승려인 백용성의 순서로 이어졌다. 나머지는 가나다순으로 명기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지휘부였던 중앙총부(서울 북촌 송현동). 이동초 제공
원로급 지도자인 윤치호 등 일부 기독교도들 역시 천도교와의 제휴를 ‘죄악’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극복하고 기독교계 대표들은 ‘민족’과 ‘독립’의 대의 아래 3·1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3·1운동이 세계 초유의 이종교 간 연합을 이끌어낸 역사적 사례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 주요 등장인물 ::
1864년 평북 정주 출생.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1907년 민족교육운동을 목적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참여했고, 1924년 동아일보 제4대 사장을 지냈다.
1873년 함북 무산 출생. 대한제국 시기 법관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국권 피탈 후 법복을 벗었다. 3·1운동에 기독교 감리파를 참여시키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을 거쳐 1952년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