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 ‘세기의 결혼식’]왕실 금기 깬 파격의 로열웨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요. 태양이 너무나 눈부시죠. 이번 결혼식은 영국 왕실의 역사적인 대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 햇살이 환했던 19일 낮 12시, 부부인 제임스 커즌(59) 엘런 쿠퍼 씨(57)는 해리 왕손과 메건 마클이 부부로 맺어졌다는 영국 성공회 수장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의 선언을 스피커를 통해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글썽였다. 이 부부는 10만 인파와 함께 윈저성 밖에서 해리 왕손 부부의 마차 행렬을 보기 위해 전날부터 기다렸다. 커즌 씨는 “평생 영국에 살았지만 왕실 결혼식에 처음 나왔다”며 “미국과 영국의 만남, 백인과 흑인의 만남, 이 모든 게 완벽한 결혼”이라고 말했다. 쿠퍼 씨는 “왕실은 인종,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영국민을 하나로 합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손자인 해리 왕손은 왕위 계승 서열이 6위이지만 출신 성분을 강조해 온 왕실의 전통을 깨고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혼혈 여배우와의 결혼으로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관례였던 부인의 복종서약 대신 남편과 동등하게 반지를 주고받았다. 결혼식 내내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던 해리 왕손과 달리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여유롭던 마클은 식장에서 나오자 멈춰 서서 남편을 바라봤다. 마클은 “우리 키스할까(Do we kiss)?”라고 먼저 제안했고 해리는 “그래(Yeah)”라고 답했다. 영국 왕실 결혼의 상징인 대중 앞의 첫 키스는 그렇게 이뤄졌다.
백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마클의 결혼식은 인종의 벽도 허물었다. 결혼식 설교를 맡은 성공회 최초의 흑인 주교 마이클 커리 신부는 설교 시작 부분에 “우리는 사랑의 힘을 발견해야 한다”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말을 인용했다. 축하 공연도 흑인 위주로 구성된 20여 명의 합창단이 미국 솔 팝송을 불렀고 흑인 첼리스트의 공연도 이어졌다.
결혼식 후 25분간 이어진 해리 왕손 커플의 윈저 시내 마차 행렬 내내 시민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0만 인파 중에는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비운의 다이애나 왕세자빈(해리 왕손의 어머니)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윈저성 밖에서 만난 조프 씨(52)는 “다이애나를 생각하며 이곳에 나왔다”고 말했다. 레딩에서 온 그는 “다이애나는 영국의 아이콘”이라며 “그녀가 죽었을 때 해리는 소년이었고 트라우마를 견디기 위해 평생 투쟁하며 살아왔다”고 해리 왕손을 안쓰러워했다.
해리 왕손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마클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런 남편을 배려해 마클은 결혼식 곳곳에 다이애나빈의 흔적을 반영했다. 피로연 때 마클은 다이애나가 생전에 끼었던 푸른색 반지를 오른손에 착용했다. 결혼식이 열린 세인트조지 성당은 다이애나가 가장 좋아하던 흰 장미로 장식됐고 마클이 든 부케에 장식된 물망초도 다이애나가 좋아했던 꽃이다. 결혼식에서 성경 낭독자로 나선 이는 1997년 다이애나빈 장례식 때 성경 낭독자로 나섰던 다이애나의 언니 제인 펠로스였다.
그러나 윈저에서 만난 영국 시민들은 왕실을 군주제의 산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역사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조프 씨는 “왕실은 영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나는 영국이 자랑스럽고, 그래서 그런 왕실의 역사가 자랑스럽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해리 왕손은 결혼식을 앞두고 할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서식스 공작 작위를 받았고 이에 따라 마클은 서식스 공작 부인이 됐다.
윈저=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