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활쏘기’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렸다. 큰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양만춘은 안시성에서 당나라 태종의 한쪽 눈을 화살로 맞혔다. 날아가던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혔다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도 유명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신궁으로 불리는 활솜씨로 우리 땅을 유린하는 오랑캐를 섬멸했다.
활에 쓸 나무를 구하러 갈 때는 말이 제공되었고 지방관의 접대를 받았다. 궁방에서 20년 이상 근속하고 활을 1000개 이상 만들면 관직을 내렸다. 군영에서 난동을 부린 궁인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우가 남달랐다. 사농공상의 차별이 현격했던 당시에 이처럼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이유는 활이 국가전략무기였기 때문이다. 활과 화살의 제작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중국 사신과의 접촉을 막기도 했다.
활과 화살은 분업으로 만들어졌다. 화살촉을 만드는 전촉장(箭鏃匠), 완성한 화살촉을 날카롭게 가는 연장(鍊匠),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장(阿膠匠), 화살통을 만드는 시통장(矢筒匠) 등의 장인이 있었다. 활은 재료와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대나무로 만든 죽궁(竹弓), 물소뿔로 만든 각궁(角弓), 사슴뿔로 만든 녹각궁(鹿角弓), 쇠나 놋쇠로 만든 철궁(鐵弓)과 철태궁(鐵胎弓) 등이 있었다. 훈련도감에는 8종의 활 1만여 장과 장전(長箭), 편전(片箭), 체전(體箭) 등 10종의 화살이 보관돼 있었다는 기록이 ‘만기요람’에 실려 있다.
이 중 각궁은 조선을 대표하는 활이다. 물소뿔, 쇠심줄, 부레풀, 소가죽, 뽕나무, 참나무를 재료로 만든다. 각궁 하나를 만드는 데 넉 달이 걸렸다고 한다. 활에는 제작자의 이름을 적어 두고 문제가 있으면 처벌했다.
각궁의 주재료인 물소뿔은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따라서 물소뿔의 안정적인 공급은 국가적 관심사였다. 세조는 물소뿔이 나라의 보물이라며 활 이외에 공예품으로 쓰지 못하게 했고, 세종은 물소를 국내로 들여와 사육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우의 뿔을 이어 붙여 향각궁(鄕角弓)을 개발했지만 잘 부러지는 데다 위력도 각궁에 미치지 못했다.
조선의 비밀병기로 취급된 편전은 ‘아기살’로도 불리는데, 일반 활의 사정거리인 120m의 세 배에 이르는 350m나 된다. 화살이 작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 피하거나 막기 힘든 무서운 무기였다. 편전을 쏘는 데 필요한 도구인 통아(桶兒)의 제작과 사용법도 극비로 취급되었다. 조선의 기술자는 천시의 대상이었지만 궁인과 시인만은 예외로 사람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활이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