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나는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돈이 안 들면서도 효과가 좋은,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가지에 관해 썼다. 즐겁게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해 공유하려 한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할 것!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은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게 이 세계의 예의다. 예의 바른 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이를 묻고, 족보 정리를 하지 않으면 대화를 시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깍듯하게 존대했다. 언니, 오빠라 부르며 고분고분 잘 따랐다. 나이가 어리면 자연스레 하대했다. 다섯 살이 네 살에게, 열다섯 살이 열네 살에게 그랬다. 가끔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집에 돌아오는 날엔 더욱 그랬다. 평생 서로 모르고 살다가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높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한 걸까? 아무리 예의를 지킨다 해도 ‘언니’라 부르는 것과 ‘야’라 부르는 건 달랐다. 한쪽은 은근슬쩍 말을 놓아도 되고, 다른 한쪽은 허락을 받아야 했다. 동등한 호칭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대학 시절 경험한 ‘반말의 마법’도 한몫했다. 학번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아리에서 삼수생이었던 난 두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기였다. 동아리 규칙상 그들은 나를 ‘성은아’라고 불러야 했다. 이내 익숙해졌고, 우린 마법처럼 서로의 나이를 잊게 되었다. 틀린 걸 지적하는 게 버릇없는 일이 아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나이만큼 세월이 주는 깨달음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답을 찾아 헤매는 존재였다.
요즘 이름에 ‘님’자를 붙여 상호 존대하는 문화가 유행이다. 멋지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습관적으로 언니, 오빠라 부를 때가 많다. 어머님, 아버님 같은 가족적 호칭을 쓸 때도 있고, 상대의 직업을 호칭으로 부를 때도 있다. 그게 나쁘다 할 순 없지만 한 번쯤은 상대에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 물어 보는 건 어떨까.
혹시 당신이 연장자라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도 한 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이건 한국사회에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기울어진 언어에 너무 오래 편안함을 느낀 건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내가 아는 비밀은 여기까지!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