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6·12회담 본궤도]北과 실무협상 이끄는 성김 스토리
이승헌 정치부장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가 극적으로 되살아난 직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주필리핀 미대사가 이끄는 협상팀이 27일부터 북측과 실무 협상을 벌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 워싱턴 조야에선 이런 말이 들렸다. 여기서 두 명의 성 김은 김 대사와 북-미 비핵화 논의를 주도했던 앤드루 김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이다. 김 센터장의 본명이 김성현이어서 이전에는 미국인 지인들은 그를 또 다른 ‘성 김’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공교롭게 50대 후반의 한국계 미국인 두 명이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앤드루 김이 비핵화 논의의 판을 깔았다면 성 김이 이제 그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김 대사가 최선희와 실무 회담 테이블에 앉았다는 소식에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발걸음’을 뗐다”고까지 했다. 그동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북핵 이슈에 별 경험이 없는 정치인들이 북-미 정상회담을 주무르고 있는 데 대한 불안감이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미 국무부에 김 대사 외엔 북핵 문제를 책임 있게 다룰 만한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김 대사는 북핵 2차 위기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6자회담 특사, 주한 미대사, 6자회담 수석대표 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역임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다뤄 왔다. 후임 특별대표인 조셉 윤이 있었지만 올해 3월 은퇴해 북핵 라인의 씨가 말랐다.
그런데 김 대사와 가까운 지인들은 김 대사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가짜뉴스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한 관계자는 “초임 대사도 아니고 현직 필리핀 대사를 협상장에 불러내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김 대사는 가장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공직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할 때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면서도 워싱턴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스타였다. 2016년 11월 3일,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김 대사의 필리핀대사 임명장 수여식에는 인근 수백 km 밖에서 온 종교인,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한인이 대거 참석하는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김 대사가 (수려한 외모로) 외교가의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라고 불리는 점을 참작하면 그의 겸손함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해 장내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김 대사의 한국어는 유창하다. 어려운 한자성어가 나오면 “왓(What)”할 뿐 대부분 안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을 만나 일 이야기를 하면 한국어를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몸에 밴 미국식 공직 기강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는 얼마 전 주한 미대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골프 치자는 요청이 참 많았다. 언제는 재벌 총수가 제안했다. 한번 쳐볼까 했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다른 재벌 총수들도 잇따라 치자고 할 테고 처신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골프를 못 친다고 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그도 퇴근 후 한국 지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일 때는 한국어를 쓰곤 한다. 홍어나 뼈째 붙은 족발 등 ‘난도 높은’ 한식 빼곤 우리 음식을 즐긴다.
그를 오래 지켜본 한 외교 소식통은 “김 대사가 미국의 관점에서, 동시에 한국에도 애정을 갖고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북핵 무대로 불려온 그가 한미를 모두 만족시킬 만한 비핵화 로드맵을 만들어 싱가포르행을 결정지을 수 있을까. 성 김 인생 최대의 협상이 시작됐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