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원하는 독재체제 보장 위해 2007년 정상회담 때 노무현은 핵물질 未신고 알고도 “잘했다” 칭찬 반공-보수-지배세력 교체 원해도 자유민주 체제는 흔들지 말아야
김순덕 논설주간
설마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가 이런 모습일 것이라곤 믿고 싶지 않다. 1일 남북 고위급 회담에선 개성공단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설 같은 풍성한 합의가 쏟아져 나왔다. 북한이 지난달 한미 공군훈련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국회 증언 등 ‘엄중한 사태’를 트집 잡아 돌연 취소했다 사안이 해결되자 재개한 일정이지만 어쨌든 평화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스파이대장을 만나 “북한은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나라”라며 북한 원조에 쓸 돈을 한국더러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자칫하면 우리는 머리 위에 핵무기를 그대로 매단 채 수시로 맞으면서 “그래도 전쟁보다 낫다”며 햇볕이나 쬐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아니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기적을 보게 되든지.
죽을 뻔한 북-미 회담을 살려낸 데는 김정은과 번개 미팅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의 공이 컸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대변인처럼 “김 위원장에게 불분명한 건 비핵화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비핵화할 경우 미국이 체제 안전을 보장해줄지의 문제”라고 나선 것은 혼돈스럽다. 내게 불분명한 건 미국이 얌전히 있는 북한 체제를 괜히 침공해 무너뜨릴지 말지가 아니라 김정은이 진짜 핵무기를 폐기할지 말지여서다.
2007년 북한 김정일과 만난 노무현 대통령도 그랬다. 회담 자리에 등장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북핵 폐기-북한 체제 보장을 약속한 9·19공동성명 이행 관련 조치를 설명하며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한다. 왜? 적대 상황인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분명히 밝혔다. 2013년 국가정보원 녹취록에서 공개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다”며 대규모 남북 경협을 골자로 한 10·4선언을 해버렸다.
결국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실이 2008년 드러나면서 9·19공동성명은 깨졌고 북한은 2009년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 실패한 길을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 문 대통령 세 사람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라며 다시 나선 셈이다.
그럼에도 모처럼 잡은 손을 놓칠 순 없다. 북한 주민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불안한 건 남한의 체제 안전이다. 북을 위한 호위무사들이 적대적 법과 제도 보완을 요구할 경우 헌법 3조 영토 조항이나 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조항을 고쳐야 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여겨 전방위 주류세력 교체를 계속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까지 함부로 교체하다가는 김정은처럼 북에서 청했던 노래 ‘뒤늦은 후회’를 부르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