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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국경 넘나든 흙수저 헨델… ‘메시아’로 찬란한 부활

입력 | 2018-06-04 03:00:00

<17> 독일인 헨델의 영국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대성공을 거두며 재기한 런던 코번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 사진 출처 코번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 홈페이지

바로크 음악의 두 거장, 바흐와 헨델이 독일에서 탄생한 지 올해로 333년이 된다. 두 천재는 서로 만나길 원했지만 계속 엇갈렸고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2명의 공식 아내와 20여 명의 자녀를 둔 성실한 가장이었다. 원조 ‘교회 오빠’로 평생 독일에서 오르간 연주와 종교 음악 작곡에 매진했다.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사진)은 음식과 와인에 탐닉하며 독신 생활을 즐겼다.

국경을 넘나든 코즈모폴리턴으로, 통속적인 오페라부터 천상의 오라토리오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였던 헨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걱정하며 유언을 남겼다. “법률가가 돼 집안을 일으킬 것.” 당시 독일에서는 궁전, 교회 등 제한된 공간에서만 음악이 연주돼 일자리가 부족했고 음악가의 삶도 고단했다.

선조 음악가만 55명에 이르는 ‘음악계의 금수저’ 바흐와 달리 오직 실력으로 승부해야 했던 헨델은 늘 새로운 길을 찾았다. 법학과를 중퇴하고 함부르크로 이동해 음악가로서 경력을 쌓아 오페라의 중심지, 이탈리아로 향한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독일로 금의환향한다. 20대 중반 하노버 궁정 음악 지휘자가 됐지만 더 큰 시장에 도전했다.


국제 정세에 밝았던 헨델이 주목한 곳은 유럽 음악의 변방인 영국. 경제가 급성장하며 오페라에 대한 수요가 늘었지만 음악가는 부족했다. 영국 왕실과 상류층의 취향을 간파한 헨델은 영국 왕립음악원을 창설하고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를 초청해 문화 시장을 키운다.

40대 초반 영국인으로 귀화한 그는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고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인생의 굴곡도 심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파산하고 중풍까지 걸려 반신불수가 된다. 하지만 유황온천이 유명한 아헨을 찾아가 의사의 처방보다 2, 3배 긴 시간을 온탕에 머물며 적극 투병했다.

기적적으로 완치된 헨델은 오라토리오에 도전한다. 24일 만에 완성한 ‘메시아’의 초연은 174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소박하게 이뤄졌다. 고난을 이기고 부활의 환희를 경험한 50대 후반 예술가의 삶이 투영돼 감동은 더 컸다. 런던 코번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에서 국왕 조지 2세와 관객들의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받는다.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절정에는 청중이 기립해 듣는 것이 전통이 됐고 지금도 크리스마스 즈음에 많이 연주되는 인기곡이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말년에 실명했지만 음악 활동을 계속한 그는 국민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고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절망의 순간에 지도를 보며 대안을 모색하고 급변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한 헨델! 그의 도전은 현대 예술가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