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제 혼란]눈치껏 ‘비근로시간’ 적는 직장인들
전 씨는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을 2교대로 지킨다. 이른 아침부터 협력업체 직원들과 점검 작업을 벌이다 보면 법으로 보장받은 점심시간 1시간은 50분으로 줄어들기 다반사다. 점심 및 저녁시간 1시간을 빼더라도 하루 11시간 일하는 셈이다. 그러나 전 씨는 하루 2시간은 ‘커피 타임’ ‘사내 복지시설 이용’같이 적당히 입력한다. 이런 시간은 근로시간에 반영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쉰 적이 거의 없다. 그 시간에는 사무실에서 잔업을 했다.
전 씨는 “일이 많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직원 대부분이 이렇게 편법을 쓰고 있다. 주 근로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면 인사팀에서 바로 담당 부장님에게 e메일을 보내니 스스로 알아서 ‘챙기자’는 뜻 아니겠느냐”며 허탈하게 웃었다.
삼성전자, LG, SK 같은 주요 대기업과 일부 중견기업은 지난해 말에서 올 초 새로운 근태(勤怠)입력 시스템을 개발해 도입했다. 주 52시간제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취지다. 근로시간과 비(非)근로시간을 따로 입력하면 일주일의 총 근로시간을 자동 계산해 52시간을 넘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비근로시간 입력제가 실제로는 ‘왜곡’ 적용되는 경우가 생겨 직장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근무를 했지만 눈치껏 휴식시간으로 입력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수도권에 있는 모 대기업 작업장에서 일하는 김모 씨(36). 담배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김 씨지만 몇 달 전 졸지에 흡연자가 됐다. 그는 하루 평균 8시간 30분을 일한다. 그러나 상사는 “웬만하면 8시간 근무로 맞추라”고 눈총을 줬다. 그날부터 김 씨는 하루 30분씩을 ‘흡연’으로 입력해 휴식시간으로 바꿔 놓고 있다.
○ 어디까지 근무고, 어디까지 휴식인가
유통업체에 다니는 정모 씨(39)는 사무직이지만 외부 사람과 협업할 일이 잦다. 정 씨는 평일에는 점심시간에 주로 이들을 만난다. 약속 장소가 멀면 오전 11시에 사무실을 떠나 오후 2시에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주말에는 업무상 골프 약속도 종종 있다.
최근 회사는 휴식시간을 입력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근무와 휴식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정 씨는 “회사는 10분 단위로 근무와 휴식 여부를 조사해 근로시간에 반영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만 내놓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문가들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빠르게 자리 잡지 못하면 직원들은 사실상 급여가 삭감된 것으로 여겨 박탈감만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회사가 법을 지키는 모양새만 취하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처하면 말단 사원은 ‘내 소득만 줄게 생겼다’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영진이 나서서 법 준수 의지를 중간관리자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