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남복 기자 knb@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해리 왕손이 결혼식을 올렸다. 주변에 있는 한국인들은 내게 영국 왕실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영국에서는 왕실에 대한 여론이 양극화돼 있다. 정확한 비율은 잘 모르겠지만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은 반면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지자들은 왕실이 영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여긴다. 반대자들은 왕실을 의미가 없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거나 왕실이 세금 지원을 받기 때문에 ‘기식자(寄食者)’라고 생각한다.
왕실 결혼식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현대 왕실의 역할로 주제가 옮겨졌다. 누군가가 ‘왕실을 없애고 싶지 않으냐’는 어려운 질문을 갑자기 던졌다. 정치 관련 주제는 친구 사이에서 논의하기에는 민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질문을 받고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인이 황실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최근에 ‘갑질’ 문제가 뜨거운 감자라서 황족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면 안 될 것이다. 그래도 한국인이 사극을 좋아하니 일단 반응이 좋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신기함과 호기심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황실도 의미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 물론 왕실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처럼 입헌군주국으로 왕실의 권력을 상당히 제한해야 한다. 영국 왕실은 자선활동을 하고 각종 행사를 열고 국가의 대표 역할도 한다.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는데 정부가 바뀔 때마다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사회적인 잣대 역할도 한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중립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 황실 복고의 제일 큰 장애는 금전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황실은 어느 정도 잘살아야 하니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영국 왕실은 자산이 많다. 정부로부터 경비를 받지만 관광객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익이 훨씬 더 많다. 국가에도 이익이다. 한국은 다르다. 100년 넘게 일반인으로 살고 있던 황손은 아마 큰 자산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서 세금으로 여러 비용을 대줘야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황실 복고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역사상으로 왕실이 복고되는 사례는 많지 않았다. 17세기 영국은 11년간 공화국으로 지내다가 왕이 다시 복귀했다. 스페인도 1975년 44년 만에 왕정을 복고했다. 캄보디아도 1993년 다시 입헌군주국이 됐다. 동유럽에서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자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례는 없었다. 미얀마, 라오스는 왕실이 망명 중이라 언젠가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젊은이의 37%는 황실 복고를 지지했다.
한국은 어떨까? 나도 종묘대제를 여러 번 봤다. 관중은 항상 많았고 반응이 좋은 것을 보니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 황실 복고와 관련된 의견을 물어보니 대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지지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단다. 다만 대한제국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모두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할 틈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로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황실이 다시 생긴다면 관련 용어들을 배우기 위해 한국어학당에 다시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TV에서 사극을 보면 왕의 대화 내용 대부분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