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다시 온다면]<1>1998년 ‘1차전 퇴장’ 하석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의 첫 월드컵 선제골과 백태클 퇴장이라는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겪었던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멋쩍게 웃으며 20년 전 백태클을 재연하고 있다. 하 감독은 “이번 월드컵에선 역적이 아닌 영웅이 탄생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명약(名藥)도 하석주 아주대 감독(50)에겐 소용이 없는 듯했다. 멕시코전 ‘백태클’의 기억을 더듬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시를 설명하는 그의 말 속엔 20년 묵은 한(恨)이 배어 있었다. “이번에 후배들이 멕시코를 잡는다 해도 이건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상처)라….”
지난달 22일 수원시 아주대. 하 감독과 아주대 선수단 숙소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운동장으로 기사에 쓸 사진을 찍으러 갈 때였다. “이런 분에게 ‘백태클 포즈’를 부탁해도 될까….”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한 채로 촬영지에 도착했다. 그때 하 감독이 분위기를 바꿔 밝은 톤으로 먼저 운을 뗐다. “이렇게요? 좀 더 다리를 뻗어야 하나? 하하하.”
그 유쾌한 반전은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하 감독이 터득한 대처 방법이었지 모른다.
이젠 한국 축구 팬 사이에 전설(?)로 언급되는 과거가 됐지만, 하 감독에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과 멕시코의 조별예선 1차전의 백태클은 잊히지 않는 현재의 기억이다. 아니 지우고 싶지만 늘 악착같이 따라붙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날처럼 어느덧 너스레를 떨며 되받아치는 요령도 생겼지만, 그때를 말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하는 건 여전하다.
“퇴장 이후 TV도 없는 라커룸에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전반까지만 해도 1-0으로 이긴 상태에서 선수들이 들어와 위로도 해줬는데 이후 후반에 밖에서 3번의 함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게 어느 편 함성인지 몰라 온갖 생각이 다 들었죠. 경기가 끝난 뒤 고갤 숙이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자 모든 게 명확해졌어요.”
빠른 발에 정확한 크로스, 공격수 출신으로 골 결정력까지 갖춰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며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풀백으로 주목받던 하석주. 하 감독은 이 경기 이후 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요즘처럼 활발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을 정도. 그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까지 고민했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후 J리그와 K리그에서 꿋꿋이 활약하며 그 오욕을 씻어냈다. 대표팀에서도 2001년까지 뛰며 ‘한국 풀백의 전설’이란 명성을 남겼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와의 경기 도중 퇴장당하는 하석주(왼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백태클에 가리긴 했지만, 멕시코전에서 넣었던 하 감독의 프리킥 골은 대표팀의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이었다. 1991년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부터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까지 95번의 A매치(국가대표 경기)에서 23골을 넣었다. 그중 하 감독이 뽑은 가장 영광스러운 골은 무엇일까.
“2000년 4월 한일 친선 경기에서 1-0 승리를 이끈 중거리 슛 골이 기억에 남아요. 통쾌하게 골망을 갈랐으니까요. (멕시코전 골은?) 뭐. 아시잖아요(웃음).”
20년 만에 월드컵에서 한국과 멕시코전이 재현될 24일 하 감독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팬들과 함께 경기를 볼 예정이다. ‘하석주 팬파크’로 이름 붙여진 이 행사는 현대자동차가 주최한다. 하 감독은 이날 팬들과 지켜볼 경기에서 자신과 같은 불운의 아이콘이 탄생하지 않길 고대한다.
“월드컵은 한순간에 영웅이 될 수도, 역적이 될 수도 있는 무대예요.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 후배들 중 누군가 실수를 하더라도 팬들이 너무 몰아치진 말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비판 수위가 높아져 선수 가족들도 상처받는 경우들이 생기는데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선 VAR(비디오판독시스템)도 도입된다는데 저 같은 후배가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역적 대신 영웅이 탄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