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거래’ 의혹 만든 임종헌… 사법행정 달인 되려다 괴물 돼 대법원 판결 형성되는 과정, 검찰 수사로 밝히기 어려워 불가능한 것 시도하다가 오히려 혼란 키우지 말아야
송평인 논설위원
단순히 청와대와 협조했다가 아니라 청와대와 협조하다가도 수가 틀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다는 그 가벼운 변신의 사고가 눈길을 끌었다. 임 전 차장이 생각하는 사법부는 국가나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법원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적 입장으로라도 변신할 수 있는 사법부였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보수든 진보든 그런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엘리트 판사의 마키아벨리스트적인 모습을 봤다. 다만 그것은 돈키호테적인 마키아벨리스트다. ‘판결을 좌지우지하는 법원행정처’는 임 전 차장의 환상 속에나 가능한 것으로, 그 환상 속 창의 위력을 과시하며 돌진하는 돈키호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재판 거래’라는 것을 선뜻 믿기 어렵다. ‘재판 거래’ 의혹을 던지려면 최소한 재판 거래가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 가늠해 보고 나서 의혹을 던지더라도 던져야 한다. 사법에 대한 불신, 특히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신은 한 사회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의혹을 던져 놓고 보자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대법관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대법원장이 얼마나 논리적 설득력을 지녔느냐는 그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다만 대법원장은 소부(小部)에서 종결되는 사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대법원장이 소부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소속 대법관들과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 정도가 예상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그런 방식의 개입은 설혹 일어난다 하더라도 부지런한 학자가 대법관의 판결 성향을 비교 검토해 학문적으로나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지, 검사가 판사들을 불러다 조사해서 ‘재판 거래’로 밝혀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 돈키호테는 실제로는 위력적인 창을 갖고 있었으나 다만 풍차를 괴물로 여기고 돌진한 사나이다. ‘재판 거래’ 의혹을 검찰 수사로 밝혀내야 한다고 촉구하는 젊은 판사들도 실은 풍차를 괴물로 여기고 돌진하는 돈키호테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재판 거래라는 괴물이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적으로 계산된 돈키호테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판사라면 법은 외면(外面)에서 출발해 내면(內面)으로 향하는 것이어야지, 내면에서 출발해 외면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판사 블랙리스트’를 주장하려면 블랙리스트 때문에 불이익을 본 판사들이 있고 나서 블랙리스트를 찾아야 한다. 정작 불이익을 봤다는 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판사 블랙리스트를 찾겠다고 남의 일기장 뒤지듯 컴퓨터를 뒤졌다. 결국 블랙리스트는 찾지 못하고 ‘재판 거래’ 의혹이 담긴 문서를 발견했다. 일기장에는 누구를 두들겨 패고 싶다고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이 폭행이 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청와대 압박 카드로 재판 거래 운운했다고 해서 실제 재판 거래가 있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문서의 액면은 청와대 맘에 들 것 같은 재판을 모아놓은 것일 뿐 재판 거래는 갖다 붙였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법관들이여, 상식적으로 생각하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