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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의 메디컬 리포트]오프라벨 약을 아이에게 계속 쓸건가

입력 | 2018-06-06 03:00:00


수술 시 사용되는 마취 관련 대표적인 약물들. 대부분이 소아에겐 미승인(오프라벨) 약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흔히 소아과 의사들은 ‘소아는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같은 질병이어도 소아는 약물을 대사시키는 간과 신장의 크기가 작고 생리기전도 다르기 때문에 치료법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인이 사용하는 감기약이나 소화제를 소아에게 절반이나 3분의 1로 줄인 용량을 투여하면 치료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약의 부작용 위험이 클 수 있다.

그런데 소아는 성인과 달리 임상시험을 통과한 약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병원에선 성인에게만 사용하는 약을 부작용 위험을 감수하면서 소아에게 투여하는 경우가 많다. 소아에게 안전성, 유효성 확인 없이 사용되는 약은 오프라벨 약(미승인 약물, 허가 외 약)으로 불린다. 국내 통계에 따르면 소아에게 쓰는 약 중 60% 이상이 오프라벨 약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부모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특히 아이를 수술할 때 사용하는 마취제의 대부분이 성인에게만 허용된 약이다. 연예인들의 상습 투여 마취약으로 잘 알려진 프로포폴도 3세 미만의 소아에게는 투여하는 게 금기이지만 병원에선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

비아그라도 소아에겐 오프라벨 약이다. 발기부전치료제로 유명하지만 소아에겐 폐동맥고혈압치료제로 사용된다. 외국에선 1999년부터 오프라벨로 사용하다 2011년 5월 유럽에서 임상을 근거로 소아용 폐동맥고혈압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소아에게 미승인 폐동맥고혈압치료제로 사용 중이다.

이러한 소아의 오프라벨 약들이 최근 의료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오프라벨 약을 널리 알리는 데 불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닌 ‘스모프리피드’였다. 이 약은 지난해 말 이대목동병원에서 신생아 사망 사건의 원인으로 밝혀진 지질 영양제인데 유럽과 한국에서는 신생아에게도 사용하지만 미국에선 신생아나 미숙아에게 사용이 금지된 오프라벨 약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선 신생아에게 스모프리피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아직 안전성, 유효성 임상시험의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재가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중환자실에 입원한 신생아에겐 어쩔 수 없이 투여하고 있다.

미승인 약물의 사용이 유독 소아에게 많은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소아 대상 임상연구를 거의 안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회의 약자인 아이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또 성인에 비해 낮은 빈도의 발병 질환이 많아 제약사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많은 비용을 들여 약을 개발해도 그만큼의 수익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에서 ‘소아의 미승인 약물 사용의 실태와 현실적인 대책’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심포지엄에서 국내 약물임상(2014∼2016년) 개수를 조사한 결과 총 224개 중 소아용 임상시험 약물은 겨우 4개였다. 소아암에도 쓸 약이 부족했다. 1948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FDA 승인을 받은 120개 항암제 중 15개만 소아에게 허가됐다.

소아에게 오프라벨 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복용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약물을 사용할 때 약의 부작용 빈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더구나 허가 사항이 아닌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국에선 국회의원들이 앞장섰다. 즉 소아에 대한 임상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신약 및 기존 약품에 대한 신규 사용 승인 시 개발업체로 하여금 소아 용도에 대한 연구 내용까지 포함시킨 소아연구동등법을 2003년에 제정했다. 또 신약 개발 시 소아 임상시험을 포함하면 특허를 6개월 연장해주는 인센티브도 운영 중이다. 유럽의 경우 2008년 7월 이후 소아에 대한 임상시험이 있어야 신규 허가 승인을 내준다. 최근엔 미국도 유럽과 같은 소아임상을 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주는 제도가 생겼다.

국내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법 제도가 전무하다. 저출산 시대에 아픈 아이들에게 안심하고 투여할 약이 턱없이 부족하다. 의사들이 환아를 살리기 위해 소위 불법으로 투여해서라도 치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안타깝기만 하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