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류 브랜드 ‘뉴룩’은 같은 디자인의 옷이어도 큰 사이즈(왼쪽)는 22.99파운드(약 3만3000원)에, 이보다 작은 기본형 상하의 세트는 19.99파운드(약 2만9000원)에 판매해 살찐 고객에게 ‘(체)지방세’를 부과한다는 논란을 낳았다. 사진 출처 영국 BBC방송 홈페이지
조은아 국제부 기자
파커 씨의 편지를 본 영국 여성들은 참아왔던 울분을 터뜨렸다. 뚱뚱하지 않은 몸매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 H&M 옷의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다른 경쟁사의 같은 사이즈 옷을 덧대 규격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는 사진도 공유했다. 결국 H&M은 4일(현지 시간) 허프포스트(옛 허핑턴포스트) 영국판과의 인터뷰에서 “여성 의류 사이즈를 영국 규격에 알맞게 변경하는 절차를 밟겠다”고 발표했다. 이젠 H&M에서 ‘10’ 사이즈 옷은 현재 ‘12’ 사이즈만큼 넉넉하게 제작돼 판매된다. 다른 브랜드의 규격과 비슷하게 맞춘 것이다.
영국 여성들의 ‘사이즈 바로잡기 대첩’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의류산업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을 보여준 일례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현재 대다수 영국 의류 규격은 1950년대 ‘W F F 켐슬리’라는 남성이 만든 신체 측정 조사를 따르고 있다. 1950년대 이후 한동안 맞춤형 옷을 제작해 입었던 여성들은 사이즈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지내다가 기업의 대형화와 함께 대량 생산이 시작되며 사이즈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의류 기업들은 드문드문 의류 사이즈 규격 표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흐지부지됐다. 정부도 필요성은 알았지만 표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소비자들이 이런 해묵은 관행을 제대로 깬 것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H&M 소비자들의 거대한 승리”라고 평했다.
기업들로서는 여성들의 이런 요구가 리스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역발상을 꾀해 소비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틈새시장’ 개척의 기회로 활용하는 패션 스타트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기성복이 잘 내놓지 않는 대형 사이즈는 의류시장 전체 매출의 약 10%를 차지한다. ‘레인 브라이언트’ ‘엘로퀴’ 등 신생 기업들은 기존 의류 브랜드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대형 사이즈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영국 블로거들에게 ‘멋쟁이 왕언니’로 통하는 조지애나 혼 씨는 볼록한 배와 굵은 허벅지를 드러낸 채 갖가지 화려한 ‘빅 사이즈’ 옷을 입은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려 이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스타가 됐다. 빅 사이즈 의류기업의 협찬 1순위다. 그의 페이스북 계정 팔로어는 22만 명이 넘는다. 빅 사이즈 시장에 대한 관심과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패션과 같은 일상 곳곳에서 여성 권익을 위한 목소리와 행동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성 평등 정책은 거창한 구호나 일부 여성단체만의 운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가 탈의실과 같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분노가 그 시작일 수 있음을 H&M 사례가 일깨워준다.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