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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를 나긋나긋 녹인 ‘김정은 반성문’

입력 | 2018-06-08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요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난수표에 가깝다. 중학생 수준의 쉬운 어휘를 구사한다지만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일부러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을 노린, 그래서 무한한 상상력을 낳게 만드는 고도의 협상가 언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만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 미국 대통령의 말이니 꼼꼼히 살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트럼프는 지난 주말 백악관에서 ‘북한의 두 번째 권력자’ 김영철을 만난 직후 기자들 앞에 섰다. 그 자리에서 그는 ‘프로세스(과정)’라는 단어를 9차례나 사용했다. “그건 프로세스다. 12일 뭔가에 서명하진 않을 것이다. 프로세스를 시작하는 거다. 그 프로세스는 싱가포르에서 시작된다. 정상회담은 무척 성공적인, 종국엔 성공적 프로세스가 될 거다.”

그동안 강조하던 비핵화의 신속한 일괄이행(all-in-one) 요구는 자취를 감췄고, 일괄타결식 합의도 한 번 만나선 어려울 수 있다며 “천천히 갈 수 있다”고도 했다. 심지어 ‘최대의 압박’이란 용어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다. 이렇게 북한에 너그러운 언사를 쏟아냈으니 당장 여기저기서 걱정과 지청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발언은 늘 상황과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트럼프는 일부 심리학자가 진단했듯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자’다.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살면서 자아를 한껏 부풀리고 과거의 진실도, 미래의 결과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다.

당시 트럼프는 큰 봉투에 담긴 김정은 친서를 건네받은 뒤였다. 그래선지 다소 흥분상태라 할 만큼 득의만만했다. 친서의 내용이 뭔지, 김영철과는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이미 일주일 전 김계관의 입을 빌려 내놓은 담화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도 이를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라고 칭찬했다.

담화의 영문본은 한글본보다 훨씬 공손하게 읽힌다. 회담 취소 사태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We can not but feel great regret for it)’며 사실상 사과했고,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 리는 없겠지만(The first meeting would not solve all, but…)’이라며 추가 회담 의사도 밝혔다. ‘유감’은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김일성이 최초로 미국에 보낸 사과의 표현과 같다. 처음에 미국은 ‘유감’ 메시지가 잘못을 시인한 게 아니라며 거부했지만 사과와 마찬가지라는 한국통의 해석을 받아들여 위기를 수습했다.

공개되지 않은 김정은의 친서에는, 나아가 진사(陳謝) 사절로 간 김영철의 입에선 유감보다 더한 사죄 표현이 있었을지 모른다. 전격적인 두 번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코치까지 받은 터이니 가히 반성문 수준이었으리라. 트럼프의 오랜 측근은 그 상황을 “김정은이 넙죽 엎드려 간청했다”고 전했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발언을 다시 살펴보면 북한의 태도를 확인한 만큼 보다 현실적 접근을 해보겠다는 수준이지, 그간의 기조가 크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불미스러운 사태’는 좌초 위기의 정상회담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았다. 트럼프는 차제에 김정은의 버르장머리를 고쳤고, 당분간 어깃장 걱정은 덜게 됐다. 김정은도 체면은 구겼지만 트럼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사는 계기는 됐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만 하긴 어렵다.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걱정은 나흘 뒤 회담에서 트럼프의 충동적 협상 본능을 과연 제어할 수 있느냐에 모아진다. 특히 굴신(屈身)도 마다않는 김정은을 상대하는 일이니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