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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의 인생 영화]애니메이션은 힘든 꿈을 꾸는 일

입력 | 2018-06-09 03:00:00

<4>곰이 되고 싶어요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딸아이가 만 세 살이 되었을 때 서울 종로의 극장에서 ‘토이 스토리 2’를 보았다. 아이의 가벼운 몸무게 때문에 의자 시트가 젖혀지지 않아 내 무릎에 앉혔다. 아이의 달콤한 살냄새와 숨소리와 웃음소리, 부드러운 배를 꼭 끌어안은 채 어둠 속에서 ‘버즈와 우디’가 맹활약하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조금씩 키가 커 가는 아이와 함께 보았다. 그 모든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지금 돌이켜 봐도 기분 좋다.

나의 인생 애니메이션 영화 중 하나는 덴마크와 프랑스, 노르웨이가 합작한 야니크 하스트루프 감독의 ‘곰이 되고 싶어요’(2004년 한국 개봉)이다. 그때 여덟 살이 된 딸아이는 혼자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볼 만큼 자랐지만, 여전히 발이 바닥에 닿진 않았다. ‘곰이 되고 싶어요’는 수채화와 색연필의 청명하고 수려한 영상미로 눈 덮인 북극의 자연을 표현했고 음악은 단아하면서도 슬펐다.

에스키모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 아기가 자신의 아기 곰을 늑대의 습격으로 잃은 아빠 곰에 의해 납치된다. 엄마 곰은 인간 아기를 자신의 아기처럼 품고 곰의 말과, 걷고 사냥하는 법을 가르친다.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인간 부모에 의해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인간의 모습과 마을은 두렵기만 하고 인간 아빠에게 사살된 엄마 곰과 자신이 같아지기를 원한다. 인간 부모들은 결국 아들의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깨닫고 어려운 결심을 한다. 인간 부모의 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낳아준 그들을 일별하곤 돌아서 이내 곰으로 변해 자연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판타지지만 가슴 저릿한 감동을 준다. 위대한 자연 앞 인간과 동물의 조화로운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약탈과 죽음,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과 그 대가를 그린 철학적 동화이다.

점점 나의 아이와 그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만들기를 꿈꿨다. 그래서 오성윤 감독과 오돌또기 제작사를 만나 함께 만든 것이 ‘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이다. 이 영화를 출발할 때 초등학생이었던 딸아이는 개봉 때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최근에는 황석영 작가의 원작 소설 ‘낯익은 세상’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유럽의 실뱅 쇼메 감독과 도미닉 버티모어 프로듀서를 만나 제작을 위한 개발계약을 마쳤다.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만드는 이들에게 긴 시간과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는 창작물이다. 전 세계 50% 시장을 차지하는 할리우드산 애니메이션, 그리고 일본과 그 뒤를 맹추격하는 중국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성장 속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은 초라하다. 300편이 넘는 한국의 실사 극영화가 매해 쏟아져 나오는 시장에서 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개봉은 서너 편 남짓이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과 음악,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뛰어난 애니메이션 영화는 실사 극영화와 또 다른 마법 같은 황홀한 순간을 보여준다. 깊은 주제의 메시지까지 잘 담아내면 전 세대를 매료시킨다. 영화 만들기가 한 편의 꿈을 꾸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애니메이션 영화는 특히 힘든 꿈을 꾸는 일이다. 나는 미력하지만 꿈을 꾼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기억하며.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