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ID 명기 못한 北-美 비핵·평화 합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 대좌 결과 나온 공동성명에는 북한의 비핵화 로드맵도, 대략의 이행 시간표도 없었다. 양국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을 약속하고, 평화체제 구축 노력에 동참하기로 했다.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두 정상은 6·25 전쟁포로·실종자 유해의 발굴, 송환을 포함한 4개 항의 이행을 위한 후속 협상을 조속히 열기로 했다.
북-미 관계의 새로운 목표를 확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포괄적 합의’였다. 곳곳에 ‘항구적이고 굳건한’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같은 형용사들이 덧붙여졌지만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절차나 시한, 보장방식 같은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다. 까다롭고 고달픈 세부 합의는 뒤로 넘긴 것이다. 후속 협상자도 미국에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기로 했지만, 북한에선 ‘적절한 고위급 관료’라고만 제시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은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 선언에 이어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했지만 미국이 집요하게 요구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은 명기되지 않았다. 김정은은 이번에도 끝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으론 ‘완전한 비핵화’조차 말하지 않은 채 싱가포르를 떠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칭한 ‘재능 있고 영리한 협상가’ 김정은은 향후 이어질 고위급회담 및 정상회담으로 단계적 비핵화의 경로를 열었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는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어제 두 정상의 만남이 가진 상징적 중요성도 간과돼선 안 된다. 한반도가 분단된 이래 70년간 이어진 두 적성 국가 최고지도자의 만남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새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한 양국 간 신뢰 구축의 첫걸음을 뗐다는 점에서다.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멋진 관계를 맺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고, 김정은은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 눈과 귀를 가리는 그릇된 편견과 관행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그리고 4시간 반 뒤 두 정상은 나란히 앉아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물론 두 정상 사이의 비공개 대화에선 향후 펼쳐질 북-미 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안보 환경의 변화를 두고 다양한 얘기가 오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을 통해 조만간 6·25 종전(終戰)선언과 두 정상의 워싱턴·평양 교차 방문 같은 정상급 외교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김정은의 귀국과 함께 북한이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이행까지 대북제재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지만 단계적인 제재 완화 조치는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프로세스는 시작됐다. 그 여정은 여태까지 걸어보지 못한, 새롭고 낯선 미지의 길이다. 전쟁 위기의 갈등과 대립에서 화해와 평화로 가는 과정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과거에도 평화를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번번이 불신만 증폭시킨 전례도 있다. 협상 과정에서 튀어나올 ‘디테일의 악마’는 물론이고 남북미와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외교 게임이 될 것인 만큼 동북아 정세는 급격하게 요동칠 것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장애물을 넘어 견고한 평화를 만드는 커다란 숙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달성이다. 북-미 정상의 합의엔 CVID가 빠졌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의 CVID 의지에 대해 “그가 이행할 것이라 믿는다”고 자신했다. 결국 트럼프의 보증이란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합의다. 북한의 CVID 없이 평화 프로세스는 지속될 수 없다. 또다시 과거와 같은 속고 속이기, 숨바꼭질 게임이 된다면 지난 몇 개월의 외교적 격동은 한여름 밤의 꿈같은 쇼로 끝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