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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신석호]김정은 날자 뜨고 지는 가설들

입력 | 2018-06-13 03:00:00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지난해 북핵 위기 국면에서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대화 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장이었다. 9월 25일 한 강연회에서 “북핵 위기 상황인 지금이 북핵 폐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며 “머지않아 6자회담 같은 다자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가 어떤 땐가. 열흘 전인 1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발사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1일 새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북한 경제 봉쇄’를 지시했다. 23일 밤에는 전략폭격기 B-1B 편대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공해상으로 진격시키는 최고의 군사적 압박도 시도했다. 모두가 한반도 제2의 전쟁을 우려할 때였다. 암흑 속에서 여명을 본 것은 ‘세계체제론’이라는 이론적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그는 2004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에 북한 문제를 대입해 이렇게 주장했다.

‘세계는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다. 어떤 나라가 그 체제에 들어가 달러 경제의 혜택을 누릴지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결정한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여러 차례 미국에 세계체제로 가는 티켓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카드를 찾아들었다. 바로 핵 개발이다.’


이런 논리로 한때 풍미했다가 사실상 폐기되는 듯했던 ‘북핵 대화용’ 가설은 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두고 화려하게 부상했다. 가설에 따르면 북한에 핵 개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이 북한에 세계체제 입장 티켓을 발급한다면 핵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폐기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상황을 독재자의 생애주기와 경험(the life cycle and experience of dictatorship) 가설로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아버지 김정일이 50대 후반이 되고 나서야 제한적이나마 개혁과 개방에 나섰던 것과 달리 스위스에서 유학한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7년의 짧은 내부 장악을 거쳐 자신이 꿈꿔온 새로운 대외관계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성명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명확한 목표는 물론이고 그 종착역에 이르는 시간표와 기착역도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채 싱가포르를 뜨자 역풍이 커지고 있다.

공동합의문이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북핵 보유용’ 가설이 다시 비상하고 있다. “돼지가 하늘을 날면 모를까(Not until pigs fly)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이 9·19공동성명을 이행할 가능성이 없다던 2006년 로버트 조지프 전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전국에 숨겨 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미국이 정말 다 찾아낼 수 있느냐는 ‘탐지능력’ 문제와 폐쇄적인 북한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사찰과 검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수용능력’ 문제도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발언이 촉발한 국제적인 논란은 과연 우리가 북한이 요구하는 비핵화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느냐는 ‘지불능력’ 문제에 다시 불을 지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는다”고 이번 합의문을 정치적으로 포장하는 데 애썼다. 하지만 북핵이 ‘대화용’인지 ‘보유용’인지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도 재점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