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김소영]북-미 정상회담의 자전거 이론

입력 | 2018-06-14 03:00:00

反共·보수 닉슨만이 중국에 갔듯 현실주의 트럼프, 회담 성사시켜
비핵화 첫발 뗀 지금부터가 시작… “페달 멈추면 자전거 쓰러진다”
전쟁 재발 막는 EU 교훈 새겨야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왜 하필이면 트럼프가…. 분단 70년 만에 적성국 수뇌가 마주한 정상회담 자리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빌 클린턴 대통령도 아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앉았다는 사실에 양가적 감정이 드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 견주는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도 왜 하필이면 닉슨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무엇보다 공화당원인 닉슨은 철저한 보수주의자이자 1950년대 매카시즘을 주도한 반공주의자였다. 냉전이 최고조로 격화되는 와중에 그런 닉슨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중국의 베트남 지원을 차단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보수층을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중국을 간다면 빨갱이 운운하겠지만 워낙 보수주의자인 닉슨이 간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수층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오직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었다(Only Nixon could go to China)’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강력한 이념적 지지나 확고한 명성을 구축한 정치인이 오히려 지지층이 반대하는 정책을 더 확실히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을 일컫는다.

트럼프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대선 캠페인 때부터 워낙 예측불허 기질로, 이번 정상회담도 ‘왜 하필이면 트럼프냐’가 아니라 ‘트럼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트럼프가 워낙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표현한 대로 ‘다들 공상과학 영화라고 생각할’ 비현실적인 일을 해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번 회담의 실질적 성과에 대한 평은 달라도, 앞으로 2차 회담이 예고된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국제정치의 수많은 이론 가운데 이름이 너무 평범해서 이걸 이론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것이 있다. 일명 ‘자전거 이론’이다. 유럽 통합 과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인데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에서는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 등 주요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종전 후 곧바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출범시켰다. 이어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창설, 마침내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유럽연합(EU)을 구성해 역내 단일시장과 단일화폐 체제를 구축하기까지 유럽 통합은 숨 가쁘게 달려온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숱한 위기가 있었으나 통합을 주도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통합 노력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가속화해야만 통합이 진전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유럽경제공동체 초대 의장이었던 발터 할슈타인이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면 속도가 느려지는 게 아니라 자전거가 곧바로 넘어지는 것에 비유하면서 자전거 이론이 탄생했다.

유럽 통합의 역사가 또 한 가지 시사하는 바는 페달을 요령껏 잘 밟으면 생각보다 쉽게 자전거를 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전후 배상금 문제가 나치의 정권 장악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교훈에 비추어 2차대전 후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은 소위 고차원의 정치(high politics)가 아니라 저차원의 정치(low politics)에서 시작됐다.

국제정치에서 고차원의 정치는 안보, 군사, 영토 등 국가의 생존에 직결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직접적인 협력을 이루기는 대단히 어렵다. 반대로 문화나 복지, 과학기술 등 정치적 생존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영역을 다루는 저차원의 정치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협력을 시작할 수 있다.

4월 남북 정상회담에 즈음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남북 간 경제, 문화, 과학기술 협력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구체적 사업과 교류로 실현된다면, 하필이면 트럼프가 나선 이번 북-미 정상회담의 후속 과정을 진전시키는 페달이 될 것이다.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