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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기홍]구속영장 10번 청구, 9번 기각

입력 | 2018-06-14 03:00:00


외환위기 당시 ‘나라를 거덜 낸 장본인’으로 찍힌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대통령경제수석은 1998년 외환위기 실상을 축소해 보고하고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한 혐의(직무유기)로 구속됐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법원의 1, 2심에 이어 2004년 대법원에서까지 무죄가 선고됐다. 형사소송법은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구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형사소송법의 원칙도 검찰의 판단에 따라 고무줄처럼 오락가락하기 일쑤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청산 수사나 이른바 ‘코드 수사’의 대상인 경우 어떻게 해서든 구속하겠다는 검찰의 의지가 너무 노골적이다. ‘삼성 노조 와해 의혹’과 관련해 검찰은 박모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11일 기각됐다. 이미 지난달 31일에도 한 차례 기각되자 “헌법이 보장하는 근로 3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중대한 헌법 위반 범행을 저지른 자”라고 반발하며 다시 청구했다가 또 기각된 것이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해 박 전 대표를 포함해 총 8명에 대해 10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그중 9건이 기각됐다. 대부분 “범죄 사실에 다툴 여지가 있으며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게 기각 사유였다. 2월 삼성의 다스 소송비 사건을 수사하다가 ‘노조 와해’ 의혹을 별도로 수사하기 시작한 검찰은 삼성전자 본사를 포함해 총 네 차례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벌여왔다.

▷‘닥치고 영장’의 대상에는 여론의 질타를 받는 사건도 포함된다. 갑질의 대명사가 된 대한항공 모녀에 대한 영장이 기각된 것도 수사당국이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을 엄밀히 따져보고 신청한 것인지, 아니면 면피용으로 일단 영장을 넣고 본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낳는다. 선진국에선 검사가 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되면 분명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 하지만 한국의 검찰과 경찰에겐 영장이 기각돼도 별탈이 없으니 여론에 민감한 사건이면 일단 영장을 청구하고 보는 것 같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